애벌레 한 마리

꿈을 꿉니다

by 이봄

애벌레 한 마리 가지끝에 매달려

연신 실을 뽑아 고치 하나 만들었습니다.

입에서 토해내는 실은 희고 가늘었습니다.

길게 이어진 실은 마침내 매듭을 지을 때까지

처음에서 끝으로 이어진 하나의

시간이었습니다.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드는 매듭들

단단히 틀어쥐고 계절의 끝에서

꿈을 꾸었습니다.

잔뜩 웅크린 몸뚱이 가끔 꾸물거려

살아있음을 증명할 때 눈보라는 매서웠지요.


봄에서 시작된 애벌레의 시간은

겨울의 복판에서 나비를 꿈꿨습니다.

꿈은 달콤하고 찰나로 스친 계절은

향기로와 아득했습니다.

배추흰나비 떼지어날아 꽃으로 피던 날,

개울가 찔레덩쿨은 쌉싸름달콤

가시돋힌 향기로 벌들을 불렀지요.

조팝나무 꽃무덤은 덩달아 어깨를 들썩이고

못줄 넘어가는 소리에 농부의 아낙은

자지러지는 한 숨 토했습니다.

"아이고야, 새참은 나오는 겨 마는 겨?"

말뚝에 묶어둔 햇살은 어느 춤엔가

달아나 꽁무니도 볼 수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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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릉 꽝꽝 천둥이 소란스럽고

쏴아 몰려가던 빗방울은 마른 먼지 풀썩이며

흙냄새를 피웠습니다.

팔 월의 매미 목이 쉬도록 울고,

원두막에 모로 누운 아저씨 덩달아

귓구멍 후벼대며 선잠을 깨야했고요.

나뭇잎 푸른 이파리 서로 부대껴 초록으로

번지면 날마다 애벌레는 가시를 키웠고

딱새며 어치는 수시로 부리를 들이댔지요.

목청좋은 꾀꼬리는 파닥이는 날개짓에도

노란 꽃물 뚝뚝 떨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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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이 쌓인 산들과 능선들

앞다퉈 타닥이던 날 꼬물꼬물 애벌레는

단단하고 후미진 나뭇가지를 찾아

몇 날 며칠을 꼬물거려야 했습니다.

때가 되었지요.

몸뚱이에 스민 시간과 살갗을 파고들던

계절을 뒤섞어 마침내 가느다란 실오라기

빼어물어야만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디마디 새겨진 애벌레의 시간은

반짝이는 날개와 기다란 더듬이로

우화해야만 합니다.

꿈입니다.

평생을 관통하는 세월이 날개짓 하나에

맺혔다 해야겠지요.

논두렁이며 밭두렁 후미진 곳에는

감국이며 구절초 노랗거나 하얗게

피고 지고 나풀거렸습니다.

첫눈 소복히 내리는 날 너는 깊은 잠에

빠져들어 겨울을 건널 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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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서 뽑아낸 실마다 계절이 맺히고

꿈조각 별처럼 반짝이듯 나도 그랬습니다.

날마다 끄적이게 되는 글씨도 그렇고

깜양도 안되는 말들은 섣부른 꿈으로 자라나

이파리 서넛 바람에 움찔거리고야 맙니다.

몇 번의 계절을 견디면 고치에서

깨어 나는 나비가 될까요?

모를 일입니다.

여섯 손가락 손톱마다 붉은 달

하나씩 띄웠습니다.

피지도 않은 봉숭아꽃 원망하면서

우물에서 숭늉을 찾던 날도 있습니다.

붉은 접시꽃 곱게 찧어 손톱에 올리면

곱게 붉은 달 뜨려나 했지요.

몇 날이고 뽑아내던 그 가느다란 실에서

봄의 향기 묻어나듯 어쩌면 손톱 위에

뜬 달에서도 꿈 하나 얼굴 내밀지도 모릅니다.

말이 쌓이고 마음이 젖어든다는 거

어쩌면 봉숭아꽃물 곱게 스미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싶었습니다.

철부지 사내녀석 손톱에 꽃물 하나 들이고서

헤벌쭉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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