앓았다

분탕질로 바람은 불고...

by 이봄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정신만이 아니고 몸뚱이도 그랬다.

마른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불어간 자리마다 서걱이는 소리가

꼬리표처럼 남았고, 퇴색된 가랑잎 몇 개

허허롭게 떠돌았다.

마치, 휘영청 밝은 달 떠오르면

반사적으로 짖고야 마는 개의

그것처럼 의미도 없었다.

반짝이던 이슬도 사라지고,

붉어 불꽃으로 타오르던 단심도

마른 바람에 무너졌는지 모른다.

거칠고 앙상한 것들 앞다퉈 발톱을 세우고,

서로를 향해 울부짖었다.

기대어 의지할 것 없는 거리에

때 맞춰 바람이 불었는 지,

아니면 마른 바람에 신경 곤두세워

사납게 발톱을 들어냈는 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사납고 거친 바람이 불었고

창문 덜컹일 때마다

서걱이는 바람이 불었고 시간은 덩달아

그 흐름을 멈춘 듯 느리게만 흘렀다.

.

.

.

.

긴 꿈을 꿨다.

의식에 새겨진 이야기는 없었다.

고만 고만한 얘기들이 안개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바람 한줌이면 허공중에 나부끼고야 말

몸뚱이는 어찌나 무겁던지

천 근의 무게로 떨어지고, 바닥을 가늠할 수 조차

없는 늪으로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몇 날 며칠 떨어지고 가라앉아

마침내 몸뚱이 모든 관절이 주저앉을 때 쯤

"내가 아프구나!"

한숨처럼 말 한 마디 끄집어내고야 말았다.

그래, 앓았다.

창문을 흔들고 가는 바람마다 잠이 들었고,

잠들 때마다 꿈을 꿨다.

꿈마다 아들이 보이고 딸이 보였다.

무의식의 언저리 어디쯤에 그리움 하나 맺혔던가.

떨어져 사는 애들이 그리웠을까?

아니면 떨어져 사는 아비가 그리웠을까?

앞 뒤를 분별하지 못 할 꿈은 꿈으로 뒤엉켜

바람으로 불어갔다.

타닥이는 불씨 하나 숲을 태우듯

외롭고 그리운 것들 순서도 없이 들불로

타올라 마침내 마른 몸뚱이 흔적도 없이

태우려나 모르겠다.

한 줌 재로 나부낄 가을만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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