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좋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by 이봄

"지금 뭐해? 밥은 먹었고?"

때 되면 날아드는 이런 말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보는 순간 마음은 따뜻해지고 미소 짓게 되지요. 말이 주는 힘이 그렇습니다. 달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 했던가요? 세 치 혀의 엄중함이 물론 저변에 깔린 말임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한 번 뱉어진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으니 화를 부를 말보다는 오히려 침묵이 주는 무게가 더 중요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침묵이 만사형통의 가치는 아닙니다. 오히려 다문 입이 만들고야 마는 족쇄도 있기 마련입니다. 운신의 폭은 좁아지고 쓸데도 없는 변명이 늘기도 하지요.

"그걸 꼭 말로 해야지 아나?"

독심술을 연마한 무림의 고수라고 생각을 하는 건지? 찰나 지간의 스침만으로도 상대의 마음을 꿰뚫는 능력은 무협지에서나 존재합니다.


'고수가 일 초식을 펼쳤을 뿐인데 나무는 일제히 한 방향으로 눕기 시작했고, 순간 나뭇잎들은 각을 세워 몰아쳐 불어갔다. 주위를 에워쌌던 한 무리의 검객들은 날아드는 비수에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추풍낙엽으로 떨어졌다'는 이런 걸 기대했다면 '무림 강호'에 도포자락 휘날리며 낙향을 해야겠지요. 푸른 검 하나 허리춤에 차고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말도 안 되는 꿈을 얘기하지 마세요. 표현하지 않는 마음은 그저 잠든 꿈입니다. 알 수가 없지요. 잠꼬대도 그보다는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바람이 불었습니다. 정자 하나 아담하게 들어선 연밭에 바람이 불었습니다. 일제히 하얀 속살 들어내며 뒤집어지는 연잎이 장관이었습니다. 채 꽃송이 피우지 못한 연밭은 우산만 한 연잎 허옇게 뒤집으며 초록 바다에 하얀 파도를 만들었습니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한 줄기 시원한 소낙비로 바람이 불었습니다.

"여기는 아직 꽃이 없네. 좀 아쉽다"

"아냐, 꽃이 없으면 어때?그냥 예쁜 연잎만 봐도 좋다"

정말 그랬습니다. 꽃이 없어도 좋았습니다. 파도처럼 불어가는 바람만으로도 시원하고 좋았습니다. 진흙의 혼탁한 물에 뿌리를 내리고 간결하고 단순하게 연잎 몇 개 우산처럼 키워내고, 바람 불면 바람으로 흔들리고. 장대비 내리면 이파리 가득 받았다가 가장 편한 모습으로 또르르 쏟아내는 연잎이 좋았지요. 그러다 수면 저 아래 진흙탕 속에서 삐죽이 꽃대 하나 살며시 내밀고야 말지요. 연꽃은 그런 꽃이더군요. 가장 낮고, 더러운 곳에서 고고하게 피었습니다. 그래서 더 고귀함을 더하는 거겠죠?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 치 혀로 뱉어내는 말이지만 내 말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날아든 씨앗들이 때를 기다리며 숨을 죽였습니다. 그러다가 적당히 비가 내리고 볕이 쬐이면 깜깜이 잠들었던 씨앗은 잠에서 깨어나 움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지요. 알아서 가지를 뻗고 꽃을 피웁니다. 정제되고 걸러진 말은 그렇게 꽃처럼 색을 더하고 향기를 보태 마침내 꽃처럼 피어납니다.

"정말 너와 나누는 말들이 좋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말이 이어지고 밤이면 달맞이 꽃으로 피었고, 볕 따가운 날에는 해바라기로 피었습니다. 당신 생각으로 자라난 말들은 그렇게 고운 꽃입니다.

연꽃 그읔하게 연못을 채우듯 나의 말은 당신의 가슴을 채울 터입니다. 분명 그럴 겁니다. 오랜 시간 숙성되고 다듬어진 말이기 때문이지요.

"당신이 좋습니다. 말은 예쁘고 가슴은 향기롭지요. 다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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