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壁

넘을 수 있을까?

by 이봄

그가 그랬다.

"넌 과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나 봐?"

사실, 사과나 배를 아삭아삭 먹어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할 수 없으니 그런 질문을 한다고 해도 어색할 일이 없기도 합니다. 딱히 내놓을 대답이 없어서 우물우물 말을 얼버무리고야 마는 내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뭐라 할까요? 과일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과하면 환장하던 나입니다. 유년의 유치가 만든 유치한 꿈을 꾸기도 했지요.

"엄마? 저는 이다음에 크면 벽장이 있는 집을 지을 거예요. 그러고선 벽장 가득 사과를 채우고서 버튼 하나 누르면 또르르 사과가 떨어지게 할 거예요!"

그러면 그러셨죠?

"그렇게 사과가 좋니?"

아,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그저 그림의 떡, 마른침만 삼키는 화중지병畵中之餠에 지나지 않지만 그랬습니다. 시큼달큰 빨간 홍옥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앉은자리에서 네다섯은 게눈 감추듯 했으니까요. 그저 바라만 봅니다. 꾸역꾸역 살아온 날들이 스치네요.

씩씩하게 살아야지 다짐을 했습니다. 더는 무릎 꿇지 말아야지 했습니다. 부러 미소도 짓고 없는 즐거움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웃을 일이 있어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 웃는 일이 온다!'는 그런 마음. 사과 가득 채운 벽장을 꿈꾸던 나는 벽장 없는 벽을 봅니다. 산 넘어 산이라고 첩첩이 산중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지은 죄가 많았나 봅니다. 그러잖아요? 전생의 업이 오늘을 만들었다고. 우울이 짜장처럼 밀려오네요.

말이 씨가 된다고 어쩌면 이 우울은 스스로 불러들인 자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들 그랬어요.

"니 글을 읽으면 어째 슬프고 아파!"

그러면 내가 그랬어요.

"산다는 건 원래 아프고 슬픈 거야!"

그래서 세상 주름잡는 작품들은 희극보단 비극이 많은 거라 너스레를 떨곤 했지요. 씨가 됐구나 싶습니다.

이 와중에 무슨 글씨를 쓰고, 도장을 찍고, 글을 쓰냐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숨구멍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누구는 술이 그럴 테고, 누구는 캄캄한 벽장에 홀로인 시간이 그럴 터이지만 제겐 이런 수다가 그나마 숨구멍입니다.

철옹성 높다란 벽, 한 잎 두 잎 움켜쥐며 넘을 수 있을까요? 담쟁이가 어째 부럽고 부러운 날에 주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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