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어찌 알고 매 번 아우성을 치는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라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잊어도 좋을 듯싶은데 총명하기가 아이와 같다. 오히려 건망증은 엉뚱한 곳에서 심통을 부려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너무도 평범하고 너무도 일상적인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어버버 말을 더듬기도 하고, 단문 한 줄 써내려 가다가 옴짝달싹 못하고 펜을 놓기도 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뇌를 쥐어짜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말들은 결국 한참이 지나고서야 생뚱맞게 떠오르곤 했다. 변기에 앉아 볼 일을 본다거나 쌀을 씻는 와중에 '아까는 미안했어요!' 머쓱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었다.너는 미안하고 나는 민망하다. 나이를 먹고 세월에 등 떠밀린다는 게 그렇지 뭐. 굳이 전화번호부 수첩을 꺼내지 않아도 깨알 같은 번호들은 제 알아서 줄을 서고 하루를 꼬박 채운 일정들은 스스로 알람을 울렸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외워 누를 수 있는 전화번호는 열 손가락을 벗어나지 못하고 수시로 드나드는 건망증은 문지방을 번들거리게 했다. 뭐였더라? 뭐였지.... 이러다가 이름 석 자를 놓고도 한참을 갸웃거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에이, 괜찮아. 다들 그러면서 사는 거야. 나만 그런 것도 아닌 걸. 억지웃음이라도 웃어 줘야, 모두 그렇다고 우겨 줘야 오늘이 그나마 들 슬플까 싶어서다.
달걀 한 알에 햄 몇 조각 프라이팬에서 익어가고 보리쌀에 기능성 현미까지 적당히 섞어 밥을 짓는다. 입에 단 백미白米는 몸에는 쥐약이라 했고, 놓치기 쉬운 단백질도 꼬박꼬박 챙겨줘야만 건강한 밥상이라는 말은 바이블로 자리를 잡았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나 선한 사마리아 인까지는 못된다 하더라도 나름 착한 환자이고 싶었나 보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될 수 있으면 지키고 싶었다. 질 좋은 단백질은 챙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깡통 햄이라도 빼먹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새벽을 깨워 밥을 짓고 국을 끓였다. 눈곱도 떼지 못하고 부스스 일어나 달걀을 꺼내고 김치를 썰었다. 작심삼일이란 말은 얼씬도 못하게 담을 쌓고 다짐의 말은 만장으로 걸었다. 마치 삶과 죽음이 거기에 있듯이 호들갑을 떨어서 그랬는가.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만 상투 위에 앉더란 말에 무릎을 치게 된다. 혹여라도 행여라도 배곯을까 싶었는지 귀신이 곡을 할 만큼 때 되면 아우성을 쳤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발버둥 치는 떼쟁이가 따로 없다. 하기사 식욕食慾과 성욕性慾은 본능이라 했으니 딱히 뭐라 나무라지도 못하겠다.목숨이 걸린 일인데 호들갑이란 말은 얼토당토않았다. 오히려 떨떠름 시큰둥한 반응이라면 그게 더 큰 문제일 터다. 의욕상실이 불러올 녀석들은 안 봐도 뻔하다. 나열하기도 싫은 부정적 말들이 엉거주춤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게 분명했다. 그보다야 '배고파요, 밥 주세요!' 아양을 떠는 게 백 배 낫다 싶었다.다만 그랬다. 오냐, 오냐 할 때 적당히 해야 했다. 턱수염도 모자라 상투까지 틀어쥐는 건 남 보기에도 꼴이 우스웠다.
가뜩이나 무위도식無爲徒食하릴없는 인생이 만 날 '밥타령'으로 날을 깨우고, 날을 재우는 것이 민망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이 모자라게 살아도 손에 쥘 것 없는 놈이 두 시간 사십 분도 뛸 일이 없다. 식충食蟲이도 아니고 밤낮 밥타령이라니.... 먹고 자고 그러다가 글 몇 줄 끄적여 시간을 죽였다. 뽀얗게 젖살 오르면 '오호, 예쁘다 예뻐....' 어르고 달래며 칭찬 일쑤인 갓난애처럼 해맑아 행복한 날들이라고 할까. 단지 지금은 몸부터 챙겨야 하는 날들이기는 하다만 그래도 그런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밥벌레食蟲도 껍질을 깨고 나오면 날개 반짝이는 나비가 될 수 있으려는지. 그럴 수만 있다면 신갈나무 억센 이파리 푸르도록 씹어 번데기가 되련마는 그도 저도 모를 시간이 흘러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