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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Mar 09. 2023

봄비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잠시 그대로 누워 빗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둠을 가르며 내리는 빗방울이 방으로 스며들고 나는 가만히 누워 모르는 척하였습니다. 부스럭대는 소리도 조심스러워 꼼짝도 못 하고 누워 눈만 껌뻑였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천장에 조명등이 어슴푸레 보이고 이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은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새벽이 밝아오는 탓이 아니라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하나씩 둘씩 찾아낸 풍경입니다. 방은 여전히 어둠이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스며든 빗소리가 봄의 냄새라도 묻혀 왔는지 꽃향기가 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조금은 비릿하고 조금은 풋내가 섞인 냄새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른 봄이라 꽃향기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욕심이겠다 생각했습니다. 들쭉날쭉한 날씨가 널을 뛰는 세상이라서 성미 급한 몇몇 놈들 벌써 꽃을 피워 으스대겠지만 역시나 때를 이기지는 못할 터입니다. 먼 남쪽 양지바른 언덕에서야 나비도 나풀거리고, 향기에 취한 벌 한 마리 갈지자로 날다 유명을 달리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나 아직은 무리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바쁠 것도 없습니다. 조바심에 애를 태울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모르는 척 딴청을 피우고 있으면 저 알아 올 터라서 그렇습니다. 스스로 그러한 게 자연이라는데 성미 급한 나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불속에서 빠져나와 의자에 앉았습니다. 등받이 깊숙이 등을 기대고는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드리워진 어둠에 기대 내리는 비가 좋아서 불도 켜지 않았습니다. 어쩐지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환하게 불을 밝히면 방안 가득 들어찼던 것들 모두가 물거품으로 터져 사라질 것만 같았습니다. 추적추적 고운 빗소리도 달아나고, 코끝을 간질이던 봄내음도 화들짝 놀라 몸을 숨길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니 불을 켤 수가 없었습니다. 모처럼 놀러 온 것들 가만가만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곁에 다가와 가볍게 어깨에 기댄 녀석들이 어찌나 예쁘던지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겉에 매달려 요란한 말들보다 가슴에 스민 말 하나가 두고두고 뇌리에 스치듯,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씻고 헹구어내면 씻길 분칠보다는 스며 하나 되는 나라면 좋겠다 합니다. 쪽 한아름 베어다가 커다란 항아리에 차곡차곡 쟁이고서, 하얗게 타고 남은 재 몇 삽 떠다 넣고는 휘휘 저어 사나흘 밀어두면, 기다림의 선물일까요. 쪽빛 같은 하늘이라 입이 귀에 걸리게 칭찬의 말 아끼지 않던 쪽물은 기다림이 만든 하늘이었습니다. 몇 번이고 쪽물에 담가 헹구고 말리기를 반복하면 마침내 눈이 시리도록 푸른 쪽물이 들었습니다.

기다리고 스며 쪽빛으로 남고 싶습니다. 애써 호들갑 떨지 않아도 아는 듯, 모르는 듯, 스며 그대의 쪽빛 하늘로 남고 싶습니다.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도 품어주고, 살갑게 불어 가는 바람도 동무 삼을 터입니다. 나비며, 새들이며, 온갖 날것들 한껏 날개를 펼쳐도 좋겠다 합니다. 스며 열리는 하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른 새벽 내게 스민 빗소리처럼 나도 너에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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