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의 끝에는 잣나무와 왕버드나무가 한 데 어우러져 작은 숲을 만들었다. 공원을 통틀어 가장 키가 큰 숲이다. 잣나무와 버드나무의 촘촘힌 이파리는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 바람을 불렀다. 이에 질세라 서양 상수리나무도 잔뜩 키를 키워 그림자를 거들었다. 그 밑에 벤치 두 개가 마주 보고 놓여 있다.
한낮의 열기가 무서워 그림자를 파고들었다. 새벽 댓바람부터 일기예보에서 36도까지 기온이 치솟을 거라 엄포를 놓았다.
"벌써 그러기야 하겠어?"
반신반의 날아든 문자를 바라보다가 헛웃음이 났다. 기우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두었지만, 하늘은 맥없이 무너졌다. 아홉 시를 겨우 넘긴 시간부터 이글이글 폭염이 기승이다. 짙은 나무 그림자를 찾아 하나 둘 모습을 감췄다.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을 넙죽넙죽 역사가 잡아먹었고, 쪼르르 몰려다니는 비둘기는 연신 뭔가를 쪼아댔다. 빵 부스러기 하나 눈에 띄지 않는데 비둘기들은 뭔가를 먹었다. 오동통 살이 오른 비둘기가 뒤뚱뒤뚱 발치에서 놀았다. 훠이~ 내쫓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쩌면 저 놈도 상수리나무 그림자를 쪼아대고 있는지 모르겠다. 비둘기나 사람이나 폭염엔 별도리가 없다. 버드나무 커다란 품에 파고들어 열기를 식혀야만 했다. 나무 하나하나가 고마웠다. 나무가 부른 바람이 열심히 가지를 흔들어댔다. 봄부터 더한 초록이 오늘처럼 고맙고 아리따울 수가 없었다.
하릴없는 남자가 대낮부터 취해 잠을 잤다. 줄지어 늘어선 잣나무 그늘이 제법 시원해 보였다. 파랗게 깔린 잔디는 푹신해서 요를 삼을만했다. 남자는 죽은 듯 잤다. 옆에는 물병 하나가 자는 주인을 지키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홈리스다. 두텁게 종이상자를 깔고 누웠다. 옴짝달싹 하지도 않았다. 잠든 그처럼 그의 시간도 공원 어디쯤을 떠돌다 잠이 들었을 터였다. 그는 몸을 누일 반 평의 잔디밭과 그만큼의 그늘이 주어지면 그만이었다. 어쩌면 그는 잠들어 깨지 않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동도 없는 숙면은 그를 깨지 않을 꿈 속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진작에 떨어져 생이별을 한 그의 시간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흘러가고 기억할 것 없이 하루가 달아난다면 슬픈 일이다.
나의 하루를 기억해 줄 사람은 없다. 내가 기억하지 않는 시간을 어느 누가 의미를 두어 기억할까. 게걸음으로 그늘이 움직였다. 잠든 남자의 어깨 위로 실핏줄처럼 햇살이 내렸다. 한낮의 깊은 잠에서 깰 시간이다. 남자의 어깨에 내린 햇살에 시간 하나 움을 틔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움을 틔운 시간은 잠든 그를 깨워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냈으면 했다. 시간의 등살에 떠밀려 그가 더는 아침부터 취해 잠들지 않기를 바랐다.
체온만큼 햇살이 쏟아졌다. 기상청이 할 일을 했구나 싶었다. 설마 하니 벌써 그러겠어?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던 문자는 어깨를 으스댔다. 우쭐대는 꼴이 눈에 거슬렸지만 백기를 들 수박에 도리가 없다. 옮겨가는 그늘을 따라 연신 엉덩이를 들썩였다. 따끈하게 데워진 바람이 불었다. 체온만큼이나 뜨거운 날이다. 심장의 붉은 피가 만드는 체온은 36.5도이다. 살과 살이 맞닿아 느끼는 체온은 따스하다. 겨울이면 그 온기가 한결 더 포근하게 스미겠지만, 굵은 땀방울 쏟는 오늘이라고 해도 체온은 따뜻하다. 복더위 위세를 떨어도 나는 너의 체온이 그립다. 아, 더위라도 한 사발 들이켰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