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힘

by 이봄


잠들기 전 새벽을 기다리며 잠자리에 들고

부스스 눈 뜨고 잠을 떨어내는 순간엔 다시 아침을 기다리는 일, 매일 매 순간마다 반복되는 기다림이기도 하고, 그게 사람이 사는 일이기도 하다. 계절을 기다리다가 몇 해를 훌쩍 뛰어넘어 강산이 변하기를 기대하는 것도 찰나의 기다림과 별반 다르지도 않다. 대나무가 마디를 만들어 견고함을 더하고 하늘로 자라나는 것과도 같을지 모른다. 기다림이란 행위로 마침내 손에 쥐고, 마음에 새기는 것들은 짧게는 시간을 튼튼하게 만들고, 하루를 단단하게 채우는 대나무의 마디와도 같다.

뿌옇게 동트는 시간이면 부리나케 밥을 데우고 냉장고의 반찬을 꺼내 허기를 면하면서도 일과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확인한다. 북적이는 전철에 기대 흔들리는 시간엔 또 다른 마디 하나를 만들고 몇 수 건너 다음을 계획하고 기다린다. 기다림은 누구나 하루를 건너는 방법이고, 시간이란 무형의 개념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사람이라면 누구나 천형처럼 짊어진 수레바퀴이기도 하다. 기다림의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생각하지 말아야지 한다고 해서 생각하지 않을 방법이 없듯, 기다리지 말아야지 다짐을 한다고 해서 기다림이란 말 자체를 지워낼 방법도 없다.

늘 줄을 세우고 그 꽁무니에 매달려 서성대는 것도 모든 흐르는 것과 굴러가는 것들의 틈바구니에 서서 나를 끼워 넣는 기다림에 지나지 않는다. 출근부에 서명을 하고 지저분한 지난밤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내면서도 나는 한 시간여의 뒤를 기다린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날씨에도 굵은 땀방울을 기껍게 흘릴 수 있는 것도, 다 알고 보면 한 시간이 흐른 뒤에 마주할 그것이 지금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결국은 기다림이다. 기다리는 이유도 기다림의 면면도 모두 다르겠지만 기다림이란 이름은 결국은 힘이라는 얘기다.

부채를 바삐 놀려대며 아주머니 한 분이 정자 그늘을 파고들었다. 숨을 다 헐떡이는 모양새가 폭염의 기세에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날이 참 덥죠? 습도까지 만만치가 않아서 오늘 정말 덥네요"

운을 뗐더니만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았다. 전 후에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를 대표한다는 소위 58년 개띠 생이란다. 덥다는 뉴스를 접한 터라서 더울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더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며 입을 뗀 아주머니의 너스레가 이어졌다.

"덥다고 집에만 있자니 약을 먹지 않으면 죽을 목숨이라서 나왔네요"

병원 검진이 예약된 날이 하필 중복이었던 모양이다. 백세시대를 목전에 뒀다고 호들갑을 떠는 요즘이지만 사실 반갑지 않은 까닭은 바리바리 약을 보따리로 챙겨야만 하는 중병백세가 끔찍해서다. 환갑을 몇 해 남겨둔 나이임에도 벌써 고장 난 몸을 달래는 나는 더욱 그렇다. 살고 죽는 것에 '적당'이라는 말이 어울릴까 싶기도 하지만, 적당히 장수하다 자는 듯 떠나는 천복을 꿈꾸었지만 벌써 남의 이야기고 보면 골골 팔십이란 말이 무섭다.

연신 부채질을 하며 병원 탐방 이야기를 늘어놓던 아주머니가 넌지시 묻는다. 혹시 지금 하시는 일이 공공근로 뭐 이런 걸로 나오신 건가요? 고개를 끄덕였다. 급히 반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자신도 혼자 사는 처지라며 일도 그렇고 기초수급자 신청도 그렇고 너무 절박하다며 이것저것 귀동냥 한 이야기를 한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을 잘랐다. 주위의 이야기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되고 소용도 없으니 가장 가까운 주민센터를 방문해 도움을 청해보라 일렀다. 여러 가지 도움이 될만한 복지프로그램이 있으니 상담을 통해 도움을 받는 게 제일 현명한 방법이다 부언하기도 했다. 정자에 터를 잡고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점점 안면이 늘어나고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요즘이다. 이러다가 널따란 돗자리 하나 펼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기다림의 목록엔 아예 들어있지도 않던 얘기들이 끼어들며 한낮의 일정이 흐트러졌다. 글 한 줄 써야만 하는 시간에 그보다도 긴 수다를 떨었다. 그렇다고 못 들은 척 귀를 닫을 수도 없다. 수다란 듣는 게 반인 까닭이다. 공원의 쓰레기를 주우며 붉게 핀 무궁화꽃을 한 장 찍었다. 단심에 대해 떠들고 싶었지만 이미 말이 많았으므로 내 마음은 여전히 그대 앞에 핀 붉은 꽃이다라는 말 몇 줄로 끝을 맺어야겠다.

"열흘 붉은 꽃 없다지만 마음에 핀 丹心은 백 년을 하루처럼 붉고 또 붉습니다. 생각 하나로 가슴 내려앉는 설렘, 그대 바라보는 내 마음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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