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러운 날

by 이봄


아침부터 햇살은 뜨겁고 바람은 후덥지근 불었다. 얼마나 더우려나? 오히려 기대가 되는 골목을 막 빠져나오려는데 아스팔트바닥에 앉아있던 나비가 날아올랐다. 두 갈래로 길게 뻗은 꼬리가 예쁜 나비다. 제비나비다. 그것도 덩치가 조금 작은 산제비나비 한 마리가 도심에서 날개를 나풀거렸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맘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말나리꽃 굵은 꽃송이를 찾았다. 새까만 몸뚱이에 새까만 날개가 멋스러운 나비다. 날개에서 꼬리로 이어지는 가장자리엔 이지러지는 손톱달 문양이 한껏 예뻤다.

짧은 만남이었다. 나비는 나풀나풀 멋진 날개를 자랑하다 골목을 벗어났고 나는 나대로 출근길을 서둘렀다. 계단을 오르고 전철을 기다리면서도 말나리꽃에 매달려 군무를 펼치던 나비를 떠올렸다. 한꺼번에 네댓 마리가 떼를 지어 날면 나는 정신을 빼앗겨 바라보고는 했다. 알록달록 호랑나비도 좋았지만 여우에게 홀리 듯 마음을 흔든 건 늘 까만 제비나비였다.

"사모님? 스텝 한 번 밟으실까요? 흐흐흐."

능글맞은 제비도 그래서 제비라 했을 테지. 외롭고 쓸쓸한 우리의 사모님들은 제비의 손짓 하나에 마음을 빼앗기고, 나는 요놈의 제비나비 손톱달 문양에 마음을 주었다. 까만 밤하늘에 수줍게 뜨다 지는 달 같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시골집 흙마당과 마당 한 귀퉁이에서 피고 지던 나리꽃을 떠올리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햇살에 까맣게 그을린 꼬맹이가 나비를 좇아 다니고 있었다.

"이 녀석아? 넌 덥지도 않니?"

마루에 앉아있던 그의 어미가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만 같은 아침이다. 고작 나비 한 마리에 시공간을 뛰어넘어 웃고 있었다.

포플러나무 커다란 그늘 밑에는 철제 담장이 공간을 나누고 있었다. 담장의 이쪽은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었고, 담장의 저쪽은 소위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쉴 새 없이 기차가 오가고 가끔은 시멘트를 잔뜩 실은 기차가 지나가기도 했다. 그러니까 저쪽은 기차를 위한 공간이었다. 경계는 초록의 철망 하나 단출하게 서있었으므로 위협적이거나 사납지 않았다. 경계를 따라 늘어선 나무들이 넉넉한 그림자를 내어주고 있었다. 끊어진 길은 굴다리로 이어지고 사람들은 굴다리를 오르내렸다.

덩굴손 야무지게 틀어진 녀석이 철망을 기어올랐다. 한 잎 두 잎 손을 내밀고 앙칼지게 틀어쥐었다. 몇 날 며칠이 걸렸을까 생각조차 어려운 시간이었겠지만 물러서지 않은 시간은 제법 그럴듯한 덤불로 보상해 주었다. 종종걸음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을 등지고 사진을 찍었다. 싱그러웠다. 보는 순간이 눈이 시원했고 바람이라도 부는 것처럼 마음마저 시원했다. 한 잎 두 잎 기어오른 녀석의 선물이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사양하지 않았다.

8월의 첫날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에는 온갖 의미를 더해 흔들리지 않을 마음을 묶어두고는 했다. 작심삼일 흔들리는 것들이 하도 많아서 묶어야만 하는 마음도 그만큼 많았다. 그런 날이다. 이제와 오늘이 다를 이유가 없었지만, 없는 이유를 찾아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의미일 수도 있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나비가 출근길을 열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 가득한 날이다 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터였고, 허위허위 덤불 하나 새초롬 만든 덩굴의 초록도 따지자면 이유일 수도 있다. 첫날에 만난 녀석들이 불쑥 내민 선물이었고 나는 넙죽 받아 들었다. 한 번의 사양은 예의라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넙죽 사양하지 않았다. 달궈진 대지에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나는 흠씬 젖고 싶었다. 그 옛날 꼬맹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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