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by 이봄


'가을'이란 말 하나면 충분한 오늘입니다. 하늘이 그렇고, 햇살이 그렇습니다. 공기가 그렇고 바람이 그렇습니다. 지나치는 것 없이 적당한 것들이 오글오글 이마를 맞대고 까르르 천진난만하게 웃네요.

아이를 닮았습니다. 한낮의 열기는 잠투정하듯 칭얼대겠지요. 아직은 그럴 때입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열매가 여물어야만 해서 그렇습니다. 들에 가득한 곡식이 알토란으로 속을 채우려면 몇 됫박의 땀이 더 필요합니다. 풀벌레가 살을 찌우고 날것들의 날갯죽지에 바짝 힘이 들어가야만 하는 시간이라서 그렇습니다. 여물고 채워야 하는 시간은 뜨겁고 곁에서 지켜보는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됩니다. 서툰 걸음마가 곁눈질 한 번에 뜀박질을 하는 꼴입니다. 날마다 다르고 시시각각이 다르게 여물 터입니다.

처음으로 졸린 눈으로 찾아들던 에어컨의 리모컨을 본체만체 지나쳤습니다.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더군요. 베란다 창에 어른대는 햇살은 말갛고 방바닥은 시원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가을이야!' 탄성을 뱉었습니다. 길고 지루한 여름을 지나고 이렇듯 찬란한 가을을 만나다니요.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풍기의 버튼을 눌렀더니, 세상에나 이게 무슨 조화인가요. 선풍기가 만들어낸 바람이 얼음장처럼 차갑습니다. 단 며칠 만의 변화라는 게 믿기지가 않습니다. 에어컨이 없다면 헉헉 바튼 숨을 몰아쉬던 선풍기도 유명을 달리할 판이었는데, 몰아 쉬던 숨이 차갑기가 그지없습니다. 놀라울 뿐입니다. 다른 건 다 속여도 계절은 속일 수 없다더니만 정말 그렇습니다. 속이고 감출 수 없는 계절의 변화에 다만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네요. 탄성을 자아내고 입을 모아 놀랍다, 경이롭다, 칭찬하고 또 칭찬하게 됩니다.

오늘은 정월 대보름에 귀밝이술을 마신 것처럼 귀를 씻어내고, 눈도 씻어내야만 하겠습니다. 마음에 쌓인 먼지도 닦아내고 입에 들러붙은 모난 말들도 떼어내고 말입니다. 도저히 거칠고 나쁜 것들을 입에 올리고 눈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계절은 이렇듯 빛나고 아름다운 것들을 눈을 피해 가며 준비했는데 어찌 모른 척 입을 닦고 눈을 감을 수가 있겠어요. 고맙다 인사를 하고, 예쁘다 박수라도 쳐야 인지상정이지요. 과하다 싶게 호응하고,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반색을 해야 신명이 날 터라서, 엉덩이 들썩이며 춤이라도 추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오늘만큼은 모질고 거친 말들, 악하고 삿된 마음들 말끔히 걷어내고서 좋은 말과 향기로운 생각만 곁에 두어야겠습니다. 말갛게 불어 가는 이 계절엔 그래야만 할 것 같아 그렇습니다.

마음이 우울하다던 그대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부러진 다리 핑계로 내세우고 온 신경 안으로만 곤두세우고서 그대는 어찌 지내는지 묻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안부도 묻지 않는다고 토라진 나만 볼썽사납게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못났지요. 내 그릇이 그만한가 봅니다.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사랑하네 어쩌네 쏟아낸 말들이 공염불처럼 가볍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부끄러운 나라서 그렇습니다.

우울하고 언짢은 마음 말갛게 불어 가는 바람에 씻어내셔요. 더는 몰라도 오늘만큼은 그대도 나처럼 가을하늘 푸른 조각 하나 싹둑 잘라 마음에 담고서 잔잔한 미소 한 번 지으셔요. 몽글몽글 예쁜 말과 국화꽃 짙은 향기 가슴 가득 채웠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이렇듯 고운 가을이 마법처럼 찾아온 아침이니까, 그래서 그런 거야 핑계 삼기도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부디 그리 하셔요. 내가 그러하듯이 그대도 그리하셔요.

더위를 걷어낸 말간 하늘에 흰구름 두둥실 흘러가고, 미처 걷어내지 못한 열기는 선들선들 바람이 식혀주는 아침입니다. 오! 놀라운 아침입니다. 저절로 환한 미소 머금게 되는 오늘은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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