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널 보듯

by 이봄


두 달여의 시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동안 염천의 여름이 지났고 가을이 성큼 곁에 와 있었다. 에어컨의 리모컨은 찬밥신세로 전락해 방바닥을 뒹굴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나는 그동안 유배지에 버려진 선비님네 흉내로 답답함을 달래야만 했다. 고놈의 탱자나무 가시는 유독 사나워서 사립문을 벗어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이고 진 머리 위로 구름이 흘러갔다. 유난을 떠는 별들은 어찌나 고왔는지 모른다. 울 안에 앉아 울 밖의 것들만 주야장천 바라보고 꿈꿨다. 생각 속에 머물러 여름을 보냈다. 철창 없는 감옥살이가 따로 없었다.

몇 달이고 원양을 떠돌던 배가 마침내 등대불빛에 이끌려 항구를 찾아들 때의 마음이 이랬을까. 바다를 닮은 하늘과 하늘을 빼다 박은 바다가 진저리 나게 푸른 세상을 벗어나 알록달록 형형색색의 것들이 손짓하는 뭍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은 감동일 게 분명하다.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은 먹먹해 말을 잇지 못할지도 모른다.

한 계단 두 계단 걸음을 떼었다. 여전히 목발에 의지했지만 계절이 바뀌고서야 겨우 두 발로 계단을 내려섰다. 걸음마를 배웠다.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건물을 빠져나와 바라본 세상은 두 달 전과 다르지 않아 눈부셨다. 여전히 푸르렀고 분주했다. 가슴 가득 들이마신 공기는 가을이 물씬 묻어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이불을 끌어다 덮으며 가을이구나 상상하던 그대로였다.

예전 널 떠올리며 생각했다. 얼마나 예쁘고 눈부실까. 너는 하얀 종이 위에 그리고 지우고 다시 또 끄적여 완성하던 상상화였다. 유쾌하고 들뜬 목소리가 하도 예뻐서 종일 귓가를 맴돌던 네가 있었고, 머릿속에 담아 그리던 상상의 얼굴이 있었다. 마침내 상상만 하던 널 만나러 가던 그 길의 설렘이 이와 같았을지도 모른다. 심장이 얼마나 콩닥대던지 잠 한숨 잘 수 없던 날이었다. 이제 다시 목발을 내려놓고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걸음을 뗐으면 좋겠다. 그것도 네게로 가는 걸음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