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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Nov 17. 2023

첫눈을 기다려


"순이야? 첫눈이 오는 날 저기 시계탑 앞에서 만나는 거야. 알겠지?"

새끼손가락 걸며 약속을 하고 그것도 미덥지 못해 엄지손가락 맞대 도장을 찍었다. 하늘이 두 쪽이 난다고 해도 꼭 봐야만 했고, 세상이 무너진다는 건 순이를 보느냐, 마느냐에 딸린 거였다. 화산이 터지고 지진으로 땅바닥이 갈라지는 건 아주 사소한 일일 뿐이었다. 그런 순이를 불러낼 수 있는 핑곗거리 중 하나가 첫눈이었다. 그러니 첫눈에 목을 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재차 삼차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한밤중에 첫눈이 내린다고 해도 난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유치 찬란한 청춘의 한때였다. 한동안은 그런 줄만 알았다. 다 어린 나이에 풋내 나는 사랑이고 사랑의 방식이었던 거야 치부를 했었다. 인생 몇 굽이를 돌아드는 동안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무심히 흘렀다.

언제였지? 너를 알게 되고부터 다시 봄꽃은 영롱했고 여름날의 소나기는 아련한 추억으로 되살아났다. 억새꽃 눈부시게 흩날리는 가을은 가슴 쓸쓸했다. 아리고 콕콕 쑤시는 계절이 흘렀고, 소담스러운 함박눈 바라볼 때에는 헤벌쭉 정신줄을 놓게도 되었다. 순간순간이 다시 처음으로 회귀된 것처럼 첫눈이 내렸고 첫 봄꽃이 어여쁘게 피었다. 다시금 설렘이었다.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고 벌겋게 얼굴이 상기됐다. 떨리는 가슴 끌어안고서 어느 시계탑 밑을 서성거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창가를 서성였다. 네가 알려준 첫눈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말에 몇 번이고 창밖을 내다보고야 만다. 하늘은 잔뜩 찌푸렸는데 시원스레 눈을 뿌리지는 않았다. 기다리는 마음은 아랑곳 않고 짐짓 딴청을 부렸다. "넌 왜 자꾸 창문에 매달려 안절부절 애를 쓰는 거니?"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장난을 쳤다. 심술보따리 하나 매단 하늘이 그다지 야속하지 않은 건 결국 나풀나풀 눈발을 뿌릴 하늘이라서 그렇다. 창문 밖이나 다시 내다봐야겠다. 그깟 눈이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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