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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Nov 23. 2023

침묵의 시간


태양은 하늘을 비껴 앉아 야박하게 햇살을 나누었다. 삼삼오오 모여든 무리들은 길게 늘어서서 햇살 한 줌을 구걸했지만 한낮의 햇살은 노루꼬리가 고작이었다. 낮게 가라앉은 하늘과 잔뜩 웅크린 대지 사이로 칼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날카롭고 차가웠다. 잔뜩 날 선 칼날처럼 위태롭게 불었다. 송곳니처럼 뾰족했다. 옷섶 사이로 파고든 바람은 따갑고 섬뜩해서 나도 모르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야만 했다. 총총총, 주섬주섬, 오들오들.... 떠오르는 말이라고는 몸짓에 관한 것들이 전부였다. 잰걸음으로 걷는다거나, 뭔가를 챙기는 모습 아니면 추위에 떠는 모습이었다. 말보다는 행동이 먼저인 계절이었다. 그래야만 모진 계절을 이겨낼 수 있었고 봄의 영광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한가롭게 말장난을 즐길 시간이 아니었어서 베짱이의 노래는 도무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어쩌다 운 좋게 끼어든 노래가 있다 하더라도 무리와 어울리지 못해 꽁무니를 내빼야만 했다. 빈둥거릴 시간이 없었다. 골목을 배회하는 것들은 온통 구겨진 휴지와 떨어진 낙엽이 전부였다. 해걸음에도 찾아들 곳 없는 것들끼리 모여 수군거리며 거리를 방황했고, 그 꽁무니를 좇아 사나운 바람이 쫄래쫄래 불었다. 험상궂은 계절에 사람들은 말수를 줄이고 침묵했다. 화나는 일이 없어도 으레 심통 하나 볼따구니에 매달고 길을 걸었다. 금방이라도 눈을 뿌릴 듯이 잔뜩 찌푸린 하늘과 다르지 않았다. 무채색 겨울은 그래서 고요했고 무거웠다. 노래가 사라졌고 말을 줄인 사람들이 심술 맞게 골을 냈다. 입이 근질거리던 사람들도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애꿎은 불똥이라도 맞을까 싶어 지레 겁을 먹어서였다. 긴 침묵의 계절이 의기양양 골목에 서서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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