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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Dec 16. 2023

첫 마음


눈이 내린다. 어제는 투닥투닥 내리는 빗소리에 입을 댓 발 빼어 물고는 투덜거렸다. 뭔 놈의 비가 계절도 모르고 몇 날 며칠 오락가락하는지 모르겠다 핀잔을 놓았다. 어쩌면 비라는 녀석도 내심 마음이 불편했을까? 빗소리 잦아드는가 싶더니만 나풀나풀 눈이 내린다. 회색빛 하늘을 배경 삼아 점점이 다가오는 눈발이 곱다. 열린 창으로 스미는 바람은 제법 차가웠지만 자리를 지키고 바라보았다.

눈 하면 막연하게 생각나는 몇몇의 말들이 있다. 첫사랑 순이가 그렇고 동화 같은 약속이 그렇다. 첫눈이 내리면 어느 역 앞 시계탑에서 보자는 둥 어설픈 동화를 쓰기도 했었다. 풋내 나는 시절에나  어울릴 말들이 다 늙어서도 가슴속에서 삐죽 얼굴을 내미는 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눈이 가져다주는 순수인지도 모르겠고 철들지 못한 유치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떻든 눈은 그래서 약속이기도 하다. 가슴에 새기게 되는 소중한 것들을 눈밭에 쓰게 되는 마음이다.

그때도 그랬다. 너를 알고 마음에 담던 날에도 나는 눈밭에 고백의 말을 남겼었다. 설레는 마음과 떨리는 시간들을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한 자 한 자 정성껏 새겨놓았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약속이었고 무릎 꿇고 고백하는 마음이었다. 내리는 눈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날을 소환했다. 동이 트도록 뛰는 가슴 진정시키며 나눈 말들이 귓전에 쟁쟁거렸다. 어제처럼 명징하게 되살아나는 시간들은 여전히 설레서 심장이 요동친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콩깍지 하나 단단히 씌었구나! 상기된 얼굴로 잠들던 새벽이 행복했다.

첫 마음이다. 첫 고백이었고 첫 다짐이었다. 눈밭에 새긴 그 마음은 여전히 콩닥콩닥 뜨겁다. 쇠를 깎고 돌을 쪼아내야만 천 년을 이겨내는 건 아닐 터다. 발그레 얼굴 붉히고서 고운 눈밭에 새긴 마음도 돌에 새긴 것과 다르지 않다. 오늘처럼 이렇게 눈 내리면 그 마음 금석맹약으로 오롯이  되살아나고야 만다. 내리는 눈 바라보다가 씨익 웃게 되는 아침이 행복하다. 너 있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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