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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Sep 15. 2016

내가 있었다

그 사실에 증명이 필요하진 않겠지만


지난달에는 농장을 떠났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떠나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무엇보다 황홀한 노을과 까마득한 별밤도 마지막일까- 하고 보니 끈적한 아쉬움이 들러붙었다. 발 밑으로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는 사이 머리 위로 어김없이 은하수가 흘렀다. 밍숭맹숭한 마음이 매캐했다.



언제라도 이 하늘, 다시 볼 수 있을까.

아직 전해줄 말도 찾지 못했는데.



아쉬움은 길고 나른했다.






떠나던 날 아침엔 이르게 눈을 떠 지난밤 팽개쳐둔 짐을 마저 쌌다. 곧 늘어놓은 옷가지와 책, 잡다한 소모품들이 38리터 배낭 구석구석에 제자리를 찾아들었다. 꾹꾹 눌러 담아 지퍼를 잠근 배낭이 익숙했다. 깨끗해진 방과 앙다문 배낭의 뒷모습을 아련히 바라보다가 문득 서글퍼졌다.


짐을 싸는 것과

내 몸 누이던 곳을 하루아침에 떠나는 일이 너무도 익숙하다는 사실에.


사실 배낭을 꾸리면서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불러 깜짝 놀라기도 했다. 도대체 나라는 인간은 언제든지 떠나기만 하면 즐거운 걸까. 괜히 모난 성질이 고개를 들어 마음이 미어졌다. 전에 느낀 적 없던 감정이었다. 깨끗하게 치워진 방이 여느 때보다 쓸쓸했다.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일 년이든, 시간을 들여 채워 넣은 흔적을 깨끗하게 비워내고 나면 지워진 삶의 자취가 마치 이곳에서 보낸 나날을 부정하는 것만 같. 내가 존재했던 시간을 뛰어넘어 처음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 변함없이 남겨질 공간과 흔적도 없이 떠날 나. 저 홀로 과거로 돌아간 집은 마치 잊히고 사라질 나를 증명하는 것만 같다. 



Chiangmai, Thailand (2015)



그새 익숙해진 노랗고 하얀 얼굴과 까맣고 파란 눈동자를 포옹 하고 돌아섰다. 모두가 시야에서 사라지도록 오래오래 손을 흔들었다. 예정된 이별이었으므로 남겨지는 자도 떠나는 자도 슬프지 않았으나 한편 서글프고 한편 불안한 기분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갈피 잃은 심경이 가을바람에 잎사귀처럼 우수수 흔들렸다. 붉은 모래 먼지가 날리는 눈부신 오후의 길을 따라 지평선과 끝없이 펼쳐진 나무들, 거대한 개미집이 타닥타닥 멀어져 갔다. 무더기 져 날아오르는 새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떠나는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시작처럼 끝도 무감했다. 덜컹덜컹 달리면서도 어지러운 마음엔 단 하나도, 확실한 것이 없었다. 한여름밤의 꿈보다도 더 하릴없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자꾸만 흘러가게 될까? 허무했다. 무엇하나 걸리는 것 없이 손가락 사이를 스쳐가는 이 시간들이 쌓여 나도 희미해질 것만 같아서 아무렇지도 않다가 별안간 쓸쓸해지기를 반복했다.



두 달 만에 돌아온 시내의 모텔은 여전했다. 무엇도 바뀌지 않은 느낌. 한걸음도 딛지 못한 느낌. 지난 두 달이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만 같은 기묘한 착각. 지난 시간에 대한 허무와 코 앞에 닥친 새 시작에 대한 긴장과 흥분, 그리고 부담감 동시에 느껴졌다. 문득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하루, 또다시 낯선 방과 내일을 알 수 없는 생활이 두렵지 않다는 사실이 두다.


이건 확실히 비정상인 것 같은데-


웅얼거리며 두렵지 않은 것이 두렵다니, 역시 모순 덩어리-라고 까득 이를 다물었으나 거대한 자유의 무게에 눌려 얕은 숨을 하악하악 쉬는 것 밖엔 별 다른 도리가 없었다.












사실 호주에 오고서는 마음대로, 뜻하는 대로 되는 일이 좀처럼 다. 그리하여 누군가 일부러 훼방을 놓는 것은 아닌가 고개를 갸웃할 만큼 계획한 바 상이하고 예상한 바와도 거리가 멀며 그리하여 당장 내일도 확신할 수 없는 변화무쌍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커다란 것부터 작은 것까지, 사소한 상실로부터 온 크고 작은 무력감으로 이따금은 어깨가 무겁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불안감은 놀라우리만치 적다. 둥실둥실 떠 가는 판자 위에 선 것처럼 두 다리가 위태로울 뿐.


시티에 머물던 어느 저녁에는 계획해 두었던 목적지를 바꾸었다. 무엇이든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삶의 터전과 계획을 언제고 손바닥 뒤집듯.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렇게 살아보겠어-' 해놓고서도


모든 것을 내 멋대로 할 수 있다는 것

이렇게나 위태로운 삶에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

두려워야 할 것이 두렵지 않다는 것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

무엇도 그립지 않다는 이 두려운 요즘.



배낭 하나에 구겨 넣은 '나'를 보 여전히 여행자인 나를 느낀다.


나는

오늘도,

여전히,

여행자.


어스름한 불안이 밀다.



여행을 좋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새로운 환경에 부딪히고 도전하는 까,

일상에서 강요되는 규칙을 피해 최선의 차선을 선택하는 까?


여지껏 찾지 못한 물음의 대답을 혹여나 찾을 수 있을까, 어둑신한 생각 언저리를 서성이는 새 또 하루가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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