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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Sep 24. 2017

디지털 디톡스

경이로운 생의 재발견


라다크를 향하는 비행기는 텅텅 비어있었다. 창가에 바싹 붙어 앉아 황무지에 우뚝 솟은 눈 쌓인 바위산과 정돈된 논밭, 곧게 뻗은 포플러 나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집을 넘겨 보며 치솟는 인류애를 느꼈다. 오랜 세월 거대하고 척박한 자연 속에 자리를 찾으려 발버둥 쳤을 사람들의 애잔한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없이 가상하고 사랑스럽다. 참으로 오랜만에 설렘을 느끼며 나는 이 곳을 사랑하게 되겠구나, 예감했다.


그렇게 도착한 라다크에서 나는 떠나온 세계와 조금 다른 속도로 살았다. 쏟아지는 아침이 눈부셔 눈을 떴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면 시 한 편을 정성 들여 읽었다. 창문을 열면 개울 흐르는 소리와 함께 부대끼는 색색의 깃발이 기다렸다는 듯 뛰어들었다. 차고 맑은 계곡물을 마셨다. 뜨거운 햇살 냄새가 나는 티셔츠를 꿰어 입고 집을 나섰다. 하루에도 몇 번씩 포플러 나무의 아득한 잎 소리를 바라보았다. 무더운 낮엔 나무 그늘에 앉아 살구를 우물거렸고, 끼니때가 되면 방금 텃밭에서 뜯은 신선한 재료로 만든 건강하고 향기로운 밥을 양껏 먹었다.


도시에 머무는 동안에도 정전이 일상이었고, 인터넷이 되는 일은 드물었다. 꼬마 전봇대가 아슬아슬 전기를 전하는 작은 마을에 가면 더 했다. 저녁 시간에야 잠깐 들어오는 전기는 열 시가 되면 끊어졌고, 그마저 여의치 않은 날엔 어른거리는 촛불에 시각을 의지했다. 공유기는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었다. 덕분에 손바닥만 한 스크린에 눈과 귀를 박는 대신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엔 달과 별이 뜨는 모습을 지켜봤다. 도시의 화려한 야경은 이토록 아름다운 밤을 지불한 대가였던가. 근사하다, 근사하다, 근사하다고 아무리 말해도 충분하지 않았다. 장대비가 쏟아진 날엔 산 너머로 연달아 무지개가 떴고 어느 골목에선 당나귀가 응앙응앙 울었다.






떠나기 전에 우려했던 바와 달리 전기와 인터넷이 없는 생활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에 잘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하고 풍족했다. 무선의 데이터와 연결되지 않은 하루하루는 눈앞의 삶에 집중하는 일을 도왔다. 쏟아지는 뉴스와 광고를 들여다보는 대신 고개를 들어 산과 하늘을 바라보고 빗소리와 바람소리에 귀 기울였다. 매일 마주하는 장엄한 척박함과 빛바랜 초록, 자글자글 주름진 아찔한 산은 보고 또 봐도 새로웠다. 그 놀라운 광경 앞에 겸허히 손을 모으면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주어진 모든 것과 살아있음에 감탄했고 시간과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이 황홀했다. 차마 헤아릴 엄두조차 나지 않는 자연의 경이 앞에서 그간 머리를 어지럽히던 삶의 의미와 이유를 향한 의문은 존재하지 않던 것 인양 수그러들었고, 압도적인 생의 무게에 본능적으로 수긍한 나는 한 마리 순한 양처럼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내가 맛본 것은 일종의 자연적인 삶이었다. 그러니까, 세계와 내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삶에 대한 체험. 자연스럽고 인위적이지 않은 생활 속에서 태초의 것이었을 것만 같은 평안과 기쁨을 느꼈다. 무엇에도 전전긍긍 서두를 필요가 없었고 가진 것으로 충분했다. 이질감 없는 세계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세계는 하루 온종일 충만하고 경이롭고 아름다웠다. 생은 한시도 지루하지 않은 것이었다.



Ladak (2017)



그렇게 지내다 큰 마을이나 관광지로 돌아오면 눈을 현혹하는 화려함과 소음에 두통을 앓았다. 이전에는 선명하게 느끼지 못하던 피로와 감각이었다. 며칠의 단식 후에 미각이 극대화되는 것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은 나를 도시의 자극에 민감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좁은 골목을 따라 늘어선 수많은 상점에 걸린 색색의 물건은 내게 필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리저리 고개가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길을 걷는 동안 몸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갖고 싶다는 욕구 같은 것. 께름칙했다. 변변한 구멍가게 하나 없던 작은 마을에서 내겐 갖고 싶거나 필요한 것이 없었다. 겨우 며칠 사이 내가 달라진 게 아니었다. 달라진 환경이 온통 소비를 부추기고 있었다. 잠시 잊었던 소유에 대한 욕망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지금껏 익숙했던 소비 패턴은 과도하고 불필요했다. 나는 필요하지 않은 것을 욕망하느라, 그리고 또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애쓰느라 너무 많은 돈과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다.






획일성을 일종의 미덕으로 강요하는 문화와 개성이 결여된 익명성 속에서 우리는 소유로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무엇을 가졌는지'로 보여주려는 거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서로를 짐작하고 평가하는 일에 익숙하다. 그러나 소비 행위가 주는 일시적 만족은 결코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소유물은 늘어나지만 불안과 불만은 증대되고 욕망은 탐욕으로 뿌리내린다. 그래서 끊임없이 소유하면서도 쉽게 지루함과 권태에 빠지며 새로움만을 병적으로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과도 강하게 연대하지 못한 불안과 비뚤어진 갈망으로 우리는 자본에 의존하며 가진 것과 가지고 싶은 것에 속박당하고 구속되기를 택한다. 그러나 실상 경쟁하듯 소유한 뒤에 얻는 것은 정신적 공허감뿐이다. 그 결과 우리는 가지면 가질수록 가난해진다.



Ladak (2017)



나를 얽어매던 세상과의 연결로부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단절된 후에 나는 고립되어 자유로웠고, 원하지 않는 어떤 것에도 현혹당하지 않아 평안했다. 가진 것으로 충분했고 무엇도 나를 대변하지 않았다. 그저 '나'였다.






물질은 나를 대변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에 만족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증명하기를 멈추고 자기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상'이나 '리미티드 에디션'이 아니라 건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유대관계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과도한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정신적 안정과 불안감의 해소 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진실은 그렇다. 우리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시시각각 변하는 관계 속에서 흘러갈 뿐이다. 우리는 소비하고 소유함으로써 허무를 덮으려 하지만 결과는 대개 처참하다.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 개인의 자유란 필요와 탐욕을 구분하는 것에서 시작해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을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자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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