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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Apr 05. 2016

어느 우울한 여름

스물둘의 독백


스물둘에 해둔 메모를 찾았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나 보다. 그대로 쓴다.






산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를 그만둘 때 삶이 온전히 내 것이 된다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퇴색하여 희미해진 지금 삶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시간은 멈추는 법이 없어 의미 없는 삶 위에도 예외 없이 흐른다. 나는 잿빛 세계부품이고 싶지 않다.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나로서 온전히 존재할 수는 없을까.


모든 것은 빛바랜다. 후회도 절망도 우울도 바래질까. 그만두고 싶다. 해온 것이 아까워서 그만두지 못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다.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서, 새로이 시작할 것이 막막해서 꾸역꾸역 집어삼키고 있는 것을 토해내고 싶다.


나는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흐르는가. '위하여'라는 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위하여, 위하여. 소리 내어보아도 내가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인가 살아지고 있는 것인가. 의지와 관계없이 시간의 흐름에 얹혀있으므로 산다기보다도 살아진다고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는 것은 왜 거부할 수 없는가. 어째서?


존재하는 것 이유가 존재하는가. 존재는 부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서로 간의 '이해'통용되지 않는 것은 '이해'가 부재하기 때문은 아닌가.


수백만 년의 시간 동안 축적되어 온 지식을 수십 년에 걸쳐 쏟아 넣는 것은 진정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가? 아니면 이해의 탈을 쓴 몰이해를 낳는가. 이해와 몰이해 사이의 간극은 얼마나 거대한 것일까. 메워질 가능성은 있을까.


교훈주의, 단순성, 결국은 실용주의에 따라 운영되는 현대 사회의 메커니즘은 무엇을 향하여 굴러가는가. 무엇이든, 무엇으로든 대체될 수 있는 사회의 빈 의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정의(定義)'의 정의(定義)는 무엇인가. 틀 속에 무언가를 구겨 넣는 것인가. 그렇다면 임의로 정해진 한계에 맞춰 무엇이든 찌그러뜨리는 것이 이 사회의 정의(正義)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무질서한 질문들은 어디를 향하는가. '답'이 존재하는 질문은 존재하는가.


솔직한 것은 언제부터 숨겨야 할 일이 되었나. 나를 나라고 말하는 것 이기적인 일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불쑥불쑥 치솟아 높아져가는 자의식은 왜 새로운 관계의 형성을 이리도 거세게 거부하는가.


바락바락 이고 서있는 나는 인가, 아니면 '이고자 하는 나'인가. 두서없이 늘어놓는 의문은 나를 이게 하는가, 위안을 주는가, 혹은 혼란만 가중시키는가.


지금 의문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사고'의 주체는 인가 시간인가. 이 기나긴 흐름에 끝은 있는가. 시작부터 존재하는 것인가. 혹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인가.


갖고 싶다. 이 의문들의 답이 아니라 끝을.













스물 두 살의 나는 존재와 그 이유에 의문이 많았던 모양이다.


끝을 찾았냐고 물으신다면 아니오,

답을 찾았냐고 물으셔도 대답은 아니오.



온통 혼란스러운 메모를 읽으며 그 시절을 떠올렸다. 작은 실패에 좌절하고 절망하며 스스로를 억압했었다. 대상 없는 분노를 삭이지 못해 끓으며 방황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미숙함과 어리석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끝없는 질문 또한 여전하지만 그간 제법 건실한 (심적) 변화들이 있었다.


따뜻하고 현명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 토닥이고 끌어안고 쓰다듬고 다. 지친 삶에 위로를 건네고 싶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사이 간극만큼 괴리가 존재한다. 스스로의 바람과 관계없이 내 안의 글이란 대개 음울하고 어설프며 병적이라 생각될 만큼 강박적다. 썩 달갑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의 모습이다. 보여주기 위해 쥐어짜 내는 것은 거북한 거짓일 뿐이다. 나로 가득 찬 나는 내가 아닌 것을 쓸 수 없다. 그것을 슬그머니 인정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일은 힘들다. 그러나 할 수 있다. 산 것에게는 살아있는 이유를 물을 권리가 없다. 뒤죽박죽 생각하고 엉망진창 사랑하리라. 어스름 새벽이 밝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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