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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May 02. 2016

두려움이 주는 기쁨

욕심과 갈망, 애착과 희망


하얀 허공을 맨발로 딛고 있었다


땅도 하늘도 없고 바다도 없어 지평선도 수평선도 없는 아득한 공간. 그 앞에 크고 작은 상자들이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구불구불 늘어서 있었다. 색도 크기도 제각각인 상자 속에는 어떤 형태든 꼭 하나씩의 이야기, 대개는 한 권의 책이 들어있었다. 별다른 의문도 없이 열심히, 부지런히, 그리고 게걸스럽게 읽었다. 상자를 찢어 무언가를 읽어내고 다음 상자로, 또 다음 상자로 달려가는 일의 반복이었다. 얼마나 많은 상자들을 열었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오랫동안 읽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눈 앞에는 여전히 선도 점도 없어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허공과 영원할 것만 같은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었다. 상자로 대변되는 아득한 욕심들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는지,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한 순간 어마어마한 무력감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았다. 내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으로는 모든 것을 읽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어쩌면 아주 일부도.






삶이 유한해 두려움을 느낀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십 년도 전에 꾼 꿈인데 아직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책에 대한 욕심으로 라틴어, 독어, 불어, 히브리어까지도 관심을 갖던 때였다. 욕심만 내다 지레 겁을 집어 먹고 도망치는 바람에 이 모양이긴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때 느낀 것이 살면서 경험한 가장 무시무시한 두려움이다. 그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독서는 지식의 습득보다는 오락이나 휴식이 되었고, 그나마도 대학에 가면서는 급격히 줄었기 때문에 두려움은 거의 잊은 채로 살았다.


그리고 최근에야 몇몇 계기를 통해 다시 상기해 냈다. 두려움은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와 함께 더 거대해진 체급을 뽐내며 압도적인 무게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를 도망치게 했던, 그 부정적인 감정에 눌려 숨을 몰아쉬면서 남모를 기쁨을 함께 느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두려움이 어떤 욕심과 갈망으로, 삶에 대한 애착과 희망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미래에서 온다.

정확하게는 경험하지 않은 시간이 가진 불확실성에서 오고

예정된 상실과 박탈과 좌절의 확신에서도 온다.


내일이 없다면 오늘이 두려울 이유가 있을까.

지키고 싶은 것, 희망하는 것이 없다면 두려운 것이 있을까.


두려움은 인생을 조각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연장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자. 그 안에 내일을 향한 열망이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삶의 또 다른 원동력이 되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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