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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May 17. 2016

단어 상실증

아주 작은 나의 세계


사전을 읽어 보려고 했다. 'ㄱ'을 다 읽기도 전에 지루해졌다. 낯선 질감의 얇은 종이도 그렇고, 작은 글씨도 그렇고. 성경과 사전은 도무지 끈질기게 읽을 수가 없다.




뭘 자꾸 잃어버리고 있어


울고 싶다. 창고를 뒤져 먼지 쌓인 국어사전을 찾아온 건 그 때문이다. 사라지는 것은 단어나 기억, 얼굴 따위의 것인데 운이 좋으면 다시 습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억상실과는 조금 다르다. 나는 이것을 '단어 상실증'이라고 부르고 있다. 주요한 단 하나의 증상은 의사를 전달하기에 앞서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언제고 말을 하려고 입을 뗐다가 머릿속이 하얘져 어버버- 얼버무리게 된다.



가령 냉장고라는 단어를 잃었다고 하자.


왜, 그 있잖아. 음식을 차갑게 두는 거. 그래, 그래! 얼릴 수도 있고 차게 할 수도 있고 말이야.


냉장고를 기억해내지 못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어이없는 일상의 단어를 잃어버린 것도 여러 번이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내지 못하는 일은 매번 스스로를 한심하다 느끼게 한다. 


언제 증상이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근에야 심각성을 깨닫고 있다. 하나씩 잃어버리기 시작한 단어가 꽤 많아졌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잃은 것은 알 수 없으므로 얼마나 많은 단어가 나를 떠났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무섭다. 얼마나 많은 것이 떠나갔는지, 또 얼마나 많은 것이 떠날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무엇을 잃었는지 알 수 없으므로 무엇을 가졌었는지  수 없다. 잃어버린 단어와 함께 기억의 조각도 사라진다.






대단히 경이롭거나 압도적이거나 숨 막히게 아름다운 풍경 앞에 섰을 때, 혹은 초자연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 감동적이어서 난생처음 느끼는 감정에 휘말릴 때, 나는 고장 난 카세트테이프처럼 멈춘다. 단지 움직임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고가 일시 정지한다.


...


그런 후에도 겨우 '말문이 막히는'이라거나 '말로 표현 못할' 정도의 형용사를 끄집어내는 것이 최선이다. 여전히 순간을 떠올리면 벅찬 마음이 고스란한데 어지간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것을 표현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변명의 여지도 없이 이유는 하나다. 그때도 지금도 적합한 단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단어로 무언가를 설명할 수는 없다.


이것이 올해 자주 느끼는 무력감의 이유다.



BKK, Thailand (2015)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일은 답답하고 불만족스럽다. 미묘하게 어긋난 의미의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해소되지 않는 욕구는 끊임없이 좌절감을 불러일으킨다.


언어와 생각의 불일치는 늘 발생해왔고 언어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부지런히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어냈지만 여전히 세계를 설명하기엔 턱없이 모자라다.


열 개의 단어를 가졌다면 세계는 열 개의 단어에 한정된다. 고작 열 개의 단어로 설명되는 세상이라니, 얼마나 편협할까. 지금의 언어도 다를 바 없다. 성에 차지 않는 단어로 나를 표현하려 애쓸 때 어김없이 깊고 어두운 괴리를 느낀다.


진실과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진실 사이에서.






내가 본 것이 하늘과도 같을 때, 실제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조각 구름에 불과하다. 내 안의 것 조차 완벽하게 표현해낼 수 없으므로 언제까지고 타인과의 관계는 이해의 언저리를 맴돌 뿐인지도 모른다. 다름 아닌 그 사실이 괴롭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는 다 알 수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내 안에서도 정의되지 못한 채 방황하다 사라진다. 나마저도 단어에 매여 순간을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통을 위한 도구로써 개발된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제한하고,

나아가 지배한다.  












글자는 세계를 구속하고, 

숫자는 질서를 가장한다.


도저히 말로 표현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자 한다. 불완전한 발명품인 언어로 무한한 우주를 설명는 것은 처음부터 역부족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애초에 언어란 시간과 공간을 멋대로 절단하고 분류하여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한 것 아닌가. 연속 세계를 임의로 해부하고 단절시키지 않았나. 아무리 잘게 쪼개도 분절된 것은 완벽한 곡선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언어는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 다분히 자의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으므로 그 경계가 매끄럽지 않고, 사회의 암묵적 합의일 뿐인 탓에 애매모호하다. 유동성을 갖고 변화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언어의 불완전성을 증명할 뿐이다.



무한한 세계를 설명하는 한정된 도구, 언어.


그 앞에서 자주 스스로의 한계를 느낀다. 나의 단어는 너무도 부족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옮길 수 없다. 그리고 나조차도 풀어내지 못하는 것을 이해받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기쁠 때 벅차오르고 슬플 때 아프도록 조여 오는 마음의 존재를 믿는다. 모두가 심장의 오른쪽 언저리에서 설렘과 두근거림과 저릿함을 느낀다는 사실로부터 서로가 그다지 다르지 않고 이해의 간극은 노력 여하에 따라 좁혀질 수 있것임을 확신한다. 한 조각 구름을 단서로 하늘을 유추해 내야 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미 꼭 닮은 각자의 하늘을 갖고 있지 않나. 세계는 무한하고 언어는 부족하고 나는 모자라다. 그리하여 온전한 이해란 어디까지나 이상에 한정될 뿐이여도 가까워지려는 노력만은 계속하고 싶다. 


너와 세계를 향한 열망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좁혀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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