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주로 들었다) 지난 잡지를 찾아와 스도쿠도 했다.
그를 듣는 일은 즐겁고,
나는 여전히 우유부단해 50%의 확률에도 숫자를 채워 넣지 못한다.
매일같이 비가 온다. 시야가 통째로 천천히 젖어들었다. 후드득 쏟아진 비는 거리를 적시고 더위를 식혔다. 방으로 옮겨진 빨래가 공격적으로 습기를 뿜어냈다. 도미토리는 금세 꿈꿈하고 습한 냄새와 어정쩡한 열기로 가득 찼다. 굵은 빗방울이 손바닥을 때리고 흘러내렸다. 젖은 공기는 꼭 만져질 것만 같다.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펼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추적추적 빗방울이 현관의 경계를 흐리고, 하나 둘 모여 앉은 사람들은 사는 이야기를 했다. 사장님은 거의 모든 것을 해탈하신 것 같다. 물욕이 증발했달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는 피해가 되지 않는 삶만을 추구하는 듯했다. 어느 날, 모든 산 것에게 예정된 죽음에 대해 생각했고 이후 즐거운 일,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그런 그가 싫어하는 것은 2가지.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과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 게스트하우스는 그것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고 지금 충분히 만족한다고 했다. 우리는 늘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에 갈등에 부딪힌다. 선택하지 못한 쪽은 기회비용으로 지불되고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부재로 남는다. 흘려보낸 나머지 한쪽의 삶이 부러운 날도 분명히 있겠지.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는 남기 마련이니 그저 자신에 충실하려 한다는 사장님은 적어도 스스로의 선택을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스물도, 서른도, 마흔도. 이상과의 괴리에 맞서 각자의 고민을 안고 있었다. 맞다고 믿고 살아갈 뿐 삶의 의미나 정답은 결코 알 수 없을 테므로 죽는 날까지 이런 고민을 떨쳐버리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러나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죽을 것이 분명하다고 해서 죽는 날 까지 흥청흥청 살고 싶지는 않다는 것. 그것은 삶이라기보다는 의미 없는 생의 연장으로 밖엔 느껴지지 않는다. 스쳐가는 생에 억지 의미를 부여하거나 나의 삶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 특별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짝하고 스러질 생일지언정 무의미로 정의하고 싶지는 않아졌다. 답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지만 적어도 답을 찾는 과정에는 닿을 수 있겠지.
본래 나는 계획과 루틴을 사랑하는 인간이다. 게다가 결정장애를 동반하는 과도한 신중함과 지병 같은 소심함을 겸비한 탓에 시리얼 고르는데도 10분은 족히 걸린다. 차치하고, 생각해봤다.
이 곳을 떠난 후에 또다시 J와 얼굴을 맞대고 이런 나날을 보낼 일이 있을까?
그리고 결정했다. 비행 일정을 바꿔야겠다.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라는 건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