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는 나의 평화가 의아하다고 했다.
자신의 스물다섯은 매 순간 환희와 놀람의 연속이었는데,
무엇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나는 꼭 할머니 같다고.
그러고 보니 나는 충분히 놀라지 않고 있다.
어쩔 수 없다.
나는 한꺼번에 많은 것을 볼 수 없고
네 곁에선 거의 모든 것이 가려지는 걸.
길 가에서 수염을 땋던 웃음이 맑은 사내에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다가가 말을 걸거나
동네 사람들에게 '안녕하세요'하고 눈꼬리를 말아 환한 아침 인사를 건네거나
골목골목 옹크린 고양이들과 눈을 맞추고 능수능란한 손길로 배를 뒤집게 하는 모습을 보기에도 나는 충분히 바빴다.
이해와 용인에 대해 이야기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다. 비슷한 사람도 있지만 온탕과 냉탕처럼 반대되는 성향을 가진 사람도 뚜렷하게 존재한다.
사장님은 그런 ‘다름’을 이해하지만 용인할 수는 없다고 했다. 용인할 수 없는 행동에는 눈을 감고 귀를 닫아 대처하신단다. 견디지 못하는 쪽이 떠나가고 그걸로 인연을 끝내면 된다는 것. 그리고 더 이상 그 관계에 대해 스트레스 받지 않는다고 했다. 얼핏 냉철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감정적인 면에서도, 관계 소모적 측면에서도 가장 합리적인 방법인지도 모른다.
반면 J는 용인할 수 있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스스로 공감능력이 모자라단다. 그것은 특출나지 않지만 뭣하나 못하는 것도 없이 고루 주어진 재능 탓이라고 했다.
나는 이해도 용인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름이 썩 달갑진 않다. (이 시점에서 완벽한 용인이 아닌걸까)
진정한 이해는 어디에서 올까? 겉을 핥는 이해는 쉽지만 진정한 타인에의 이해라는 건 정말로 불가능한 영역의 것이 아닌가 하는 뿌리 깊은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내가 너를 이해하고, 네가 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보다 완벽한 것은 또 없을 텐데.
이런 생각 뒤엔 Bang(마피아와 비슷한 룰의 보드게임)을 몇 판 했고 거짓말을 못하는 얼굴 덕에 줄줄이 패했다. 예전에는 좀처럼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법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남 보기 불편할 정도로 표현하게 되어버렸다. 고등학교 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계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만은 솔직하고자 했던가. 어쨌든 그때부터 '싫은' 감정에 유독 솔직해졌다. 좋게 말하면 호불호가 확실하다던가 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그냥 싫은 걸 참기 싫은거다.
나는 나, 너는 너. 우리는 다르다. 사실 틀리다 해도 고쳐줄 생각도 없다. 비겁하고 게으른 이기적인 인간. 타인을 폭넓게 용인하는 나의 관대함은 일부 이런 무관심과 무책임에서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부끄럽다.
나는 무엇을 위해 떠나왔을까? 자주 의문한다.
2주 전만 해도 더 이상 도피가 아니라 확신했지만 어쩌면 이 또한 (사실은 여행이라는 행위 자체가) 감정적 도피는 아닐까, 생각했다.
생을 지속하는 모든 이를 존경한다. 나약하고 나약한 나는 납득할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찾을 때까지 여행을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누군가 나를 이해하고,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벌써 3개월 전의 이야기구나. 의사는 내게 웃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여전히 대부분의 일을 괜찮다고 말하고 거의 모든 일에 웃고 있다. 다만, 지금은 정말로 모든 것이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