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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by 잉지


J가 스물너댓이었을 무렵 쓴 글을 읽었다.

그도 나처럼 자의식 과잉의 시기를 보냈을까?

그는 나의 글을 보며 그 시절을 떠올린다고 했다.

나는 그를 보며 그 나이 즈음의 나를 상상한다.






삶의 본질적인 의미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을까?


첫 여행 이후 한동안 내 생의 목표는 여행이었다. 처음엔 다분히 도피성으로 떠났고 그 후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떠났으며, 언젠가는 떠나기 위해 떠났고 이따금은 무어라도 될 거라는 이상한 확신으로 떠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고 어느새 여행은 목표의 자리를 내놓고 수단의 자리로 옮겨갔다. 그 빈자리를 한동안 행복이 차지하는가 싶더니 그마저도 슬그머니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굳이 목표 삼지 않아도 원하는 바를 추구할 때 그 끝에는 늘 행복이 있더라. 그러므로 '행복'이라는 것은 자체로 목표라기 보다도 어떤 궁극적인 부산물의 지위를 주는 편이 알맞을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목표는? 하고 묻는다면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의미를 찾는다, 정도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의미는 사랑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에 지치고 사람에 상처받으면서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고 사랑해왔다. 아마도 그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사랑이라는 것이 모든 예술의 지겹도록 뻔한(그럼에도 지겹지 않은) 주제가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삶과 사람과 사랑이 그토록 닮은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어떤 무의식에서 비롯된다 해도 이유 없는 결과는 없는 법이다.



한동안 결함이 많은 나는 다시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서글펐던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나는 할 수 있다. 아직 찾지 못했을 뿐. 어쩌면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여행을 갈망해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아직도 운명을 믿는 종류의 인간이다.

순응하지는 않겠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의아하리만큼 거대한 확신으로 믿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J는 어떤 희망이자 깨달음이었다.



또 하나의 우주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무엇도 확신할 수 없지만 이 불확실만은 확신한다.

조급하지만 조급해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어디서든 운명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다만 필요한 것은 조금의 여유인지도.



...


겨우 3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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