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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May 29. 2016

하늘 관찰 일기

새들은 어디로 가나요?


01.


며칠간 비가 왔다. 빗줄기가 꽤 거세어서 감금 아닌 감금 생활을 해야 했다.

내내 쏟아지던 비는 셋째 날 저녁에야 그쳤다.

고삐 풀린 망아지보다 겨우 조금 얌전한 정도로 신나게 라군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산책로를 걷노라니 저 멀리서 갈매기 두 마리가 다가온다.


함께 움직이는 것들, 비슷하게 동작하는 것들, 같은 곳을 향하는 것들에겐 오묘한 감동과 아름다움이 있다.

하늘을 향해 치켜올렸다가 바다를 향해 꺾어 내리는


펄럭 펄럭-


동일한 날갯짓. 한동안 육지를 향하던 새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일시에 방향을 바꾸어 해안과 평행하게 멀어져갔다. 한동안 멀어지는 새의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온 적도 없는 것을 떠나보내는 기분이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함께.


그것은 다만 날갯짓이라기보다도 함께, 의 몸짓으로 보였다.

 

함께라는 것이 저리도 아름답다.



Cairns, AU (2016)


02.


낮엔 추적추적 굵은 비가 내리더니 저녁 무렵엔 마법처럼 그쳤다. 다시 신나게 라군으로 향했다.

집에 가만히 있는 건 도대체가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다.


이번엔 멀지 않은 곳에서 배 세대가 전진해온다. 뻘과 흙빛 바다의 경계가 선명하질 않아서 마치 진흙을 헤치고 오는 것 같다. 기묘하다. 그나저나 저렇게나 해안 가까이 들어와도 괜찮은 수심인 걸까, 쓸 데 없는 걱정을 했다. 흘수, 같은 단어가 머리를 스쳤다. 지난 5년간 주워들은 지식은 무의식 중에 이렇게 튀어나온다. 가끔 우습다.




03.


길을 거스르는 동안 몇 무리의 새떼가 활강했다. 아름답다.


규칙 없는 규칙으로 무리지은 것들.


함께 동작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매번 재미있다. 언뜻 엄숙함마저 감돈다.  




04.


돌아오는 길, 구름 아득한 하늘로부터 해가 진다.

붉다기보다도 주황, 아니 분홍이 섞인 다홍, 옅은 산호색, 파스텔 핑크.


색의 이름들을 떠올리느라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섰다가 조금 울화가 치민다.


아니, 대체 이걸 무슨 색이라고 해야 해?


이럴 때 나는 컬러코드를 통째로 뇌 속에 집어넣고 싶다.




05.


칼로 잘라낸 듯 반듯한 구름 아래 그림자가 짙었고 숨은 해가 하늘을 물들였다. 흔히 말하는 '불타는' 같은 형용사보다는 기이할 만큼 '신성(Holy)한' 느낌이 강해서 한 순간 저 구름 위엔 정말로 날개 달린 뭔가가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모서리가 어지러운 푹신한 구름을 만져보고 싶다.  


저무는 빛을 머금은 하늘

빗 속에 요연히 넘어가는 해를 보면서

히말라야 어느 산맥에서 구름은 디딜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임을 깨날은 까맣게 잊었다.




06.


매일매일 걸음을 멈추게 하는 하늘이라니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석양이라니

언제라도 기쁘다.



Cairns, AU (2016)
Cairns, AU (2016)



07.


날개를 펄럭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오른발과 왼발을 디뎌 앞으로 나가는 것과 비슷할까.



낮엔 기껏 비둘기가 돌아다닐 뿐인데 저녁이면 새까만 새떼가 라군 뒤편을 향해 날아간다.

계절을 따라 장소를 옮기는 철새처럼 하루를 주기로 어딘가로 돌아가는 걸까?


다들 어디로 갈까, 저렇게 날아서


궁금해졌다. 저렇게나 많으므로 모두가 앉을 수 있을 만큼 많은 가지가 있는 곳일까.

해안 따라 들어선 아파트 칸칸을 메운 사람들처럼 새들도 빼곡히 숲을 채우고 살까?


날개가 있다면 저것들, 한번 좇아 보고 싶다.

좇아보고 싶다, 고 생각했다.



Cairns, AU (2016)



08.


해질 무렵에는 어김없이 새들이 난다.


한 무리의 새떼가 전진할 때마다 솨아-하고 바람이 다.

수십 개의 작은 날갯짓으로 이루어진 바람이.


한참을 귀 기울여 봐도 도저히 글로 옮길 재간이 없어 그저 쨋-쨋-,이라고 써둔 소리가 이따금 끼어들었다.




09.


매일매일의 하늘이 거의 경의로울 지경이다.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

 

시야가 트이자마자 오른쪽으로 어린아이 볼 같은 사랑스러운 분홍빛이 눈에 띄었다. 저런 색이 하늘에서 나기도 하는구나,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흩어놓은 솜뭉치 같은 회색 구름이 뭉텅뭉텅 뜯겨 있고 아래 천천히 살구빛이 차올랐다. 하늘과 살구가 섞이고 파랑과 분홍의 경계가 흐려졌다.


문득 바다 너머로 못 보던 섬이 있어 원래 저런 게 있었던가- 고개를 갸웃했는

알고 보니 느긋하게 바람을 따라 밀려가는 거대한 회색 구름이었다.




10.


너무 많은 색이 있어서, 그마저도 가만히 있질 않고 시시각각 변해와서


눈을 처음 뜬 사람처럼

하늘을 처음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온 하늘을 두리번대고 서 다.


아아, 붉어진 하늘.

아아, 옅은 보라를 거쳐 남색을 향하는 밤.


여전히 섬처럼 짙은 먹구름과

쇠털 같은 나날.




cairns, AU (2016)



11.


석양은 하늘보다 구름에 더 짙게 물든다.

경계도 없이 퍼진 빛의 산란을 바라보고 있자면 도저히 걸음을 뗄 수가 없다.


어느 대가의 그림도 이처럼 보드라울 순 없을 거야



보랏빛 도는 하늘은 미묘하다. 미묘하게 정의할 수 없는 채로 아름답다.

수평선 한 뼘 위를 기준으로 균일하지 않은 대칭으로 퍼져가는 빛, 그리고 어둠.

이렇게 많은 색을 갖고도 얼룩덜룩하지 않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하늘은 몇 가지 색을 가질까? 알 수 없는 것을 궁금해한다.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하루에 몇 번씩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그 덕에 하얀 낮달도, 노오란 밤 달도 자주 마주한다. 하루하루 경이로운 석양을 보려고 저녁이면 빠짐없이 바닷가를 향한다. 좀처럼 지루할 새가 없다.


반대로 이지러졌다가 다시 차오르는 달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사실 그거면 충분하다고도 생각한다.

어둠으로 시간을 가늠하고 달로 기간을 가늠하는 일이 즐겁다.

불쑥 고개를 치미는 불안감과 초조함을 그러안은 채로 기쁘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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