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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by 잉지


J는 영원불변해야 할 사랑이 그 모양과 색을 달리하는 것에 배신감을 느낀다고 했다.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존재하지만 각개 사랑의 본질, 그것이 변해서는 안된다고.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었다.






오후에는 언젠가 J가 봐 두었다던 카페에 갔다. 높은 책장을 빼곡히 메운 책과 앙증맞은 소품, 알록달록 개구진 장난감과 노트, 기억해두고 싶은 문구들이 새겨진 티 코스터(Coaster). 작은 테이블 위에는 생화가 꽂힌 화병이 놓여 있었고 벽을 따라 드문드문 붙은 문학 포스터가 눈길을 붙잡았다. 그저 '북카페'라는 단어로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어쿠스틱으로 재편곡된 지난 세기의 명곡이 퍽 어울리는 그곳은 벽난로 앞 서재마냥 편안하고 따뜻한 매력이 있었다. 작지만 빠짐없이 알찬 카페의 구석구석에서 정성을 듬뿍 들인 공간이라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얼마간 책을 들여다보던 J는 여동생에게 선물할 거라며 책을 한 권 골라왔다. 그리고 첫 장을 펼쳐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의 메시지를 정성스레 옮겨 적기 시작했다.


WITH FREEDOM, BOOKS, FLOWERS, AND THE MOON
WHO COULD NOT BE HAPPY?

_Oscar Wild


어색하게 펜을 쥐고 삐뚤빼뚤 글씨를 쓰는 모습을 너무 빤히 바라보았던가 보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펜 끝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그럼에도 눈길을 거둘 수 없었다.



어린아이 낙서 같은 글씨와 손날에 번진 펜 자국에 허둥대던 모습,

그리고 그날의 햇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가 들려주었던 수많은 이야기는 어느새 희미해져 어렴풋한 모양으로, 느낌으로, 향기로 덩어리 져 떠오를 뿐인데 몇몇 순간들은 이토록 또렷하고 생생하게 남아있다. 신기하다.



Exhibition Water Color of Asean _Bangkok Art and Culture Centre, 2015



5시가 넘어서야 카페를 나다. 이전부터 별러왔던 전시를 보러 갈 참이었다. 수상버스를 타고 씨암(Siam)으로 향했다.


어쩐지 방콕에서 홀로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초행길이 아닌데도 버스에서 내려선 당연한 듯 방향을 잘못 잡았고 그마저도 한참을 걸어가서야 깨달았다. 온 길을 되짚어가면서 ‘역시나’ 하는 마음에 피식 웃었다.


Art and Culture Centre는 씨암 쇼핑가 중심에 있다. 4, 5층에는 태국의 오래된 만화, 3층엔 말레이시아의 수채화 드로잉(Exhibition Water Color of Asean), 1층에서는 흑백 풍경 사진전(Black and White Thai Land Scape 2015)이 전시 중이었다. 생각보다 다양한 전시가 큰 규모로 풍성하게 진행되고 있어서 놀랐다. 드로잉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수채화로 색을 입힌 말레이시아의 풋풋함이 예뻤다. 그림 속 페낭은 꼭 비오는 여름 날 같았다. 사진으로 종종 접해온 풍경도 완전히 새로웠다. 누군가의 손끝에서 피어난 그 곳에는 사진과는 또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묽고 촉촉한 페낭을 눈으로 따라 그으면서 어느 날에는 저곳에 가봐야지,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 유난히 붉은 달이 가로로 누웠더니 어느새 모습을 감췄다.



여행 중에도 급작스레 우울이 고개를 쳐드는 순간이 있다.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 무얼 하는 걸까? 이 시간들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무엇이 두려운 걸까?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엔 무어라도 알 수 있을까? 무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는 것이 최선은 아닐까?



정돈된 삶을 살고 정갈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타인을 통해서도 나를 통해서도 스스로를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나는 어디에 있을까?


무너진 잔재 위에 나를 쌓아 올려야 해.

그런데 매끈하지 못한 바닥이 아직도 흔들리고 있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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