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건 기억하고 준 건 잊는 삶
친구와 동네의 한 이자카야에 앉아 소츄와 따뜻한 오뎅을 나누던 밤이었다. 여자친구와 다툰 씁쓸한 마음을 안고 들어선 가게는 붉은 조명 아래 따뜻한 나무결이 마음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날 밤 나는 '주는 것'과 '받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배우게 될 줄 몰랐다. 첫 술 국물의 온기에 차갑게 얼었던 마음이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술잔이 몇 번 기울어졌을 무렵 친구가 물었다.
"왜 돈을 많이 벌고 싶어?"
나는 잠시 생각한 뒤 천천히 말했다.
"내 욕심 때문은 아닌 것 같아. 내가 돈을 많이 벌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지켜줄 수 있잖아. 그들이 편안하게 도전하고 꿈꿀 수 있도록 든든한 배경이 되어줄 수도 있고. 부모님이 갑자기 아프시거나, 친구가 힘든 시기를 겪을 때 주저없이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삶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런 마음으로 사는 삶이 진정으로 행복할 것 같아."
내 입에서 나온 말에 스스로가 조금 놀랐다. 그동안 나는 이기적 욕망을 위해 돈을 벌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내 진심은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다. 친구를 만나 밥 한 끼, 술 한 잔을 사줄 때 주머니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웃고 싶었던 것,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마음보다는 해줄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살고 싶었던 것.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내 진짜 소망이었다.
친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받은 건 기억하고 준 건 잊으며 살라는 말이 있어. 그래야 사람 관계가 편해진대. 우리는 늘 받은 것은 당연하게 여기고 준 것만 기억하잖아. 그러니까 늘 억울하고, 불만이 쌓이고. 내가 뭘 해줬는데 상대는 나한테 뭘 해줬는지 체크하다 보면 관계가 어그러지기 쉬운 거지. 반대로 생각하면, 받은 걸 감사하게 여기고 준 것을 잊어버리면 마음이 훨씬 가볍지 않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크게 울렸다. 나는 늘 내가 상대에게 준 것을 세밀히 기록해두고, 받은 것은 쉽게 흘려버렸던 게 아닐까. 특히 연인 관계에서는 더욱 그랬다. 내가 상대에게 준 헌신을 기록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희생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희생이 쌓이면 결국 관계의 끝은 늘 좋지 못했다. 나 역시 받았던 사랑을 잊고, 준 것만 기억하며 관계를 지켜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여자친구와 다툰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서로의 입장보다 내가 양보했다는 생각, 그리고 내 자존심만 앞세웠던 것이 문제였다. 결국 관계는 서로 무게를 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것임을 잊었던 것이다. 마침 친구의 연락으로 술자리를 갖게 되었고,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이경규 선생님의 인터뷰에서 들었던 '대확행'이란 말이 문득 떠올랐다. 소소한 행복이 아니라, 더 본질적이고 큰 행복을 추구한다는 말이었다.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이 아니라 어머니가 계심에 행복하다'는 말처럼, 존재 자체에 감사하는 마음. 내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얼마나 작은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살았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친구가 있음에 감사했다. 술이 있어서, 맛있는 음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 터놓고 진심을 나눌 친구가 있음에 감사했다. 함께 성장하고 배움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삶을 보듬을 수 있는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은 소소한 행복이 아니라 명확한 대확행이었다.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고, 나 역시 그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을 수 있는 그 시간이 참으로 소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여자친구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희생과 헌신 사이에서 헷갈렸던 감정들을 털어놓았다. 함께 잘 지내고 싶다는 내 진심을 담았다. 어려운 말을 입 밖에 내는 용기가 결국 관계를 살리는 헌신임을 그날 처음 깨달았다. 서로의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는 것이 오히려 더 단단한 관계를 만든다는 것을 배웠다.
테이블 위 오뎅의 따뜻한 국물처럼, 이 밤의 대화는 내 마음을 데웠다. 앞으로도 나는 돈을 벌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헌신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받은 것은 기억하고 준 것은 잊으며 살아가고 싶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크고 따뜻한 헌신일 테니까.
#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