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愛, 뜻 情—두 글자 사이의 거리—
입술이 설레던 계절이 끝나면,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이젠 정만 남았어.” 하지만 정(情) 속엔 이미 사랑 愛가 깊이 스며 있다. 꽃이 지고 열매가 영글듯, 설렘이 지나간 자리엔 애정이 깊이를 더한다. 사랑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모양을 바꿔 조용히 가슴 한복판에 눌러앉았다.
오랫동안 연애 중인 친구 커플이 있다. 어느 날 그가 푸념했다. “예전엔 안 보이던 단점이 자꾸 보여.” 나는 웃으며 물었다. “혹시 네 시선이 깊어진 건 아닐까?” 사랑은 대상이 달라지기보다, 바라보는 시선이 깊이를 바꾼다. 처음엔 반짝이던 빛에 눈이 머물고, 시간이 흐르면 그림자와 결까지 드러난다. 그걸 ‘끝’이라 오해하면 사랑이 식었다 느끼지만, 사실은 애(愛)가 정(情)으로 방향을 틀었을 뿐이다.
나 역시 과거 연애에서 ‘머물러 주는 것’을 사랑이라 믿으며 수없이 희생했다. 늦은 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차의 엔진을 깨웠고, 내 일정과 피곤을 감수하며 상대의 빈틈을 메웠다. 이해인 줄 알았지만, 돌이켜보니 그것은 포기에 닿아 있었다. 희생은 자신을 꺾는 일이고, 헌신은 내가 설 수 있는 자리에서 손을 내미는 일임을 늦게야 배웠다. 일방적 희생은 마음에 작은 균열을 냈고, 그 틈 사이로 상대의 단점만 들여다보게 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IOS(Inclusion of Other in the Self), 즉 '너와 내가 겹쳐지는 현상'이라 부른다. 상대를 나의 일부로 여기다 보니, 상대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마치 내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듯한 답답함과 분노를 느끼게 된다. 이 현상을 알게 된 후, 상대의 화난 모습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많이 사랑하기에 그 경계를 넘어왔다는 생각에, 어쩐지 화내는 얼굴마저 사랑스러웠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속 대사 한 줄이 오래 남았다. “우리가 어느 한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어도 사랑은 온전할 수 있다. 완전한 합일을 강요하면 실망이 남지만, 모르는 부분을 품고 사랑하면 관계는 다시 숨을 쉰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나는 나, 너는 너. 숫자만이 옳고 그름을 깔끔히 가르지만, 사랑은 숫자가 아니다. 애정은 ‘당연함’을 먹고 시들고, 존중을 먹고 자란다.
태양조차 언젠가 식는다. 완전한 타인 둘이 하나의 궤도를 도는 일에 당연한 것은 없다. 관계를 살리는 건 당연함 대신 깃드는 세 문장이다. 미안해. 고마워. 덕분이야. 이 말들은 거절과 수용 사이에 부드러운 완충 지대를 만들어 준다.
과거 연인들에게는 미안함이 남는다. 일방적 희생이 잘못된 사랑의 공식을 남겼을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은 포기 대신 이해를, 희생 대신 헌신을 연습한다. 설렘이 잦아들어도 사랑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색이 짙어졌을 뿐임을, 정(情) 안에 사랑이 이미 머물고 있음을 이제는 안다.
오늘도 나는 상대에게, 그리고 내게 말한다. “너를 사랑해.”라는 문장 사이사이에 “미안해, 고마워, 덕분이야.”를 고이 끼워 넣는다. 그 말들이 스스로를 비워내고 서로를 채우는 느린 숨결이 되어, 오래 맴돈다. 오늘도 그 거리를 존중하며, 천천히 사랑을 이어 간다.
#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