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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트 May 10. 2018

참고 견디는 것은 미학이 아니다



뭔가 안 맞는 일을 자꾸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것 같은 불편함이 들 때. 이 때 사람은 두가지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다. 입고 있던 옷을 벗거나, 아니면 그 옷에 나를 맞추거나.


대다수의 사람은 후자를 택한다. 부모님도 예외는 아니다. "어떻게 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니? 원래 다들 그렇게 살아." 직장에 다니는 친구도 말한다. "돈 벌려면 하기 싫어도 해야지." 결국 입기 싫은 옷을, 맞지도 않는 옷을 억지로 입기를 택함으로서, 나에게 꼭 맞는 옷을 찾기를 포기한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옷을 벗지 않는 자들에게, 새로운 옷을 입을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옷가게에 가야 옷을 사는 법이고, 피팅룸에 가서 옷을 입어봐야 사이즈를 알 수 있기에. 그러나 나는 두렵다. 혹시라도 지금 이 옷을 벗어던지면, 이보다 더 나은 옷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하고 자위하면서, 옷을 벗는 시늉을 하다가도 냉큼 제자리로 돌아온다. 하지만 옷을 과감하게 벗어던진 사람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입고 있던 옷을 집어던지면, 새로운 옷을 보는 명확한 기준이 생긴다. 나에게 맞는 질감, 사이즈, 가격대는 물론,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 브랜드가 명확해진다. 무엇이 맞지 않았는지 몇년간 고민하고 확인했기에, 이제는 더이상 방황하지 않는 자신만의 눈, 즉 판단력이 생긴 것이다. 선택사항이 무궁무진할 것 같지만, 이같은 기준이 있기에 의외로 그 다음 옷 선택은 매우 빠르게 이뤄진다. 옷 하나만 줄창 입고 있을 때 갇혀있던 사고가,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제고와 선택의 경험에서 크게 확장되는 것이다.


한 가지만 고수하던 똥고집도 사라진다. 좌절과 포기를 하는 습관도 사라진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던 고정관념도 깨진다. 내가 원하는 것, 내게 맞는 것을 찾아 매일 하루 여행을 떠난듯, 모험을 하듯 신이 난다. 남들이 보기에는 모험일지 모르나, 나에게는 그저 행복한 일상일 뿐이다. 나는 가야할 길을 알고, 명확한 선택의 기준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조금 실수해도 괜찮다. 그 실수가 나를 더 단단하고 완벽하게 이끌 테니까.




언제부터일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참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아마도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일 것이다. 좀 놀아볼까 하다가도 쩌렁쩌렁 울려대는 운동장 종소리에 황급히 교실로 뛰어갔다. 수업에 조금 늦었다고 복도에서 두손을 들고 벌을 서면서, 나는 배웠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참고 견뎌야 할 것이 있다'고. 


대학에 가면 자유롭게 수업을 듣고 내 마음대로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대학은 이미 '우수한 학생'의 기준을 학점과 타이트한 가이드라인으로 정해놓았다. 출석을 잘하고, 지각하지 않으며, 과제를 잘하고, 조발표를 잘하는 학생으로. 규칙적인 생활이 안 맞는 학생은 억지로 규칙적이 되어야 했고, 주어진 과제보다 스스로 뭔가를 찾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은 교수가 시키는 것만 해야 했고, 발표가 낯선 내성적인 학생은 빨개진 얼굴을 하고선 다리 벌벌 떨며 발표를 하곤 했다. 하기 싫어도 해야 했다. 그렇게 짜여져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시켰기 때문에.


물론 그조차 나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학교를 다니고, 대학을 가는 것도. 그것이 맞지 않으면 다른 대학을 가면 되지 않느냐, 혹은 학교를 자퇴하고 창업을 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겐 그럴 용기가 없었다. 이미 두발로 혼자 서는 법을 잃어버린 나였기 때문일지도.


얼마나 세뇌당한 것일까.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온 것일까.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며, 누군가 강요하는 삶을 살며, 그냥 그렇게 시키는 대로, 주어진 대로 살아온 나의 삶은 얼마나 오래된 것일까.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내 육체의 두팔 두다리가 아니라, 진짜 내 영혼의 두 발이 다시 스스로 일어설 수 있을까. 그들에게 말해본다. '자, 늦지 않았어. 이제라도 다시 서 보자.'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을 위해, 나에게 맞는 삶을 위해, 내가 원했던 삶을 위해, 나에게 맞는 옷을 입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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