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뭉크- <뱀파이어>
물을 아무리 마셔도 목이 너무 말랐다. 어젯밤부터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특히 3교시 체육시간에 햇빛을 보자 아예 구역질이 올라왔다. 소녀는 반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보건실 침대에 몸을 뉘었다. 며칠 전 소녀는 깊은 잠 속에서 반복적인 생생한 꿈을 꾸었다. 안개가 자욱하고 어두운 숲 속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기분 나쁘게 가까이 들려오자 소녀는 힘을 다해 달렸다. 발을 딛을 때마다 나뭇 가자가 밣혀 부서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 엄마, 나 무서워... 누구 없어요?”
소녀의 외침은 어둠 앞에 묻혀버렸다. 그때였다. 소녀의 목덜미에 날카로운 큰 바늘 같은 것이 차갑게 찔렀다.
“ 악.....”
비명과 함께 눈을 떴다. 방안 스탠드를 켜고 꿈에서 찔린 목덜미를 살펴보았다. 피 같은 것은 없었으나 전에 보지 못했던 동그랗고 검은 반점 2개가 보였다. 마치 무엇에게 물려서 나은 상처 같았다. 정신이 또렷해지고 탁상시계 소리가 귓가에 들리기 시작했다.
‘ 4: 32 ‘
잠이 오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에서 소녀는 꿈 해몽 사이트를 들어가서 자신이 꾸는 반복적인 내용을 살펴보았다.
- 밤에 무엇에게 쫓기거나 동물에게 물리는 꿈-
해석: 최근에 큰 충격이나 기억에 남는 장면을 잊지 못하거나 몸이 허약해진 경우에 자주 꾸는 꿈임. 건강 적신호일 수 있으니 반복된다면 병원 진료가 필요함.
소녀는 최근에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지난 화요일 미술시간에 배웠던 뭉크의 그림들이 찝찝하고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이상한 그림 속 사람들은 한결같이 눈알에 점하나 가 다였고 해골 같았다. 그리고 뭉크가 그린 소녀들은 하나같이 죽음의 그림자(어머니의 죽음, 사춘기, 흡혈귀 등)가 표현되어 있었다.
‘ 괴상한 그림을 봐서 그런가......’
목이 너무 말라 냉장고를 열고 생수를 들이켰다. 물맛이 오늘따라 더 쓴맛이 났다.
“ 지영아, 아침 또 안 먹고 가? 다이어트하니?”
엄마의 걱정과 달리 배가 너무 고팠지만 음식을 보자 토할 것 같았다.
“ 아니, 입맛이 없어서... 급식 많이 먹을게.”
소녀는 어제부터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다. 지친 몸으로 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했다. 오늘은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였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날씨와는 달리 집을 나서고 몇 분이 지나자 몸이 아주 가벼워졌다. 어제와는 너무 달라진 컨디션에 소녀는 놀랐다.
수요일 1교시는 체육이었다. 수업 시작 종이 치자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간간히 천둥번개 소리까지 아침부터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웠다.
" 뭐야... 늦가을에 웬 천둥이랑 소나기가 내려... 짜증 나... 우산도 없는데."
소녀의 반 아이들은 낯선 날씨로 인해 불평을 쏟아냈다.
오늘 강당 수업은 저번 주에 들었던 공 멀리 던지기였다. 여학생들은 특히나 던지기가 약했다. 신체 구조상 어쩔 수 없는 부분도 많았다. 많은 여학생들이 힘껏 던졌으나 땅바닥에 공을 내리 꽂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 한지영, 지난 수업 때 안 왔었지? 던져볼래?"
소녀는 체육 선생님의 권유에 주뼛주뼛 나왔다. 야구 공보다 좀 더 큰 파란 공이었다. 손에 잡기는 다소 컸다. 반 아이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다들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소녀는 그냥 생각 없이 던졌다. 공은 아주 빠른 속도로 2층 강당에 설치된 전광판에 큰 소리를 내면서 맞고 떨어졌다.
" 지영아.... 너 초등학교 때 공던지기 선수였어?"
놀란 선생님은 당황하며 물었다. 공 던지는 모습을 본 몇몇 친구들도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은 또 일어났다. 3교시 미술시간이었다. 학교 가을 축제에 쓸 포스터 그리기 수업이었다. 오랜만에 쓰는 포스터 칼라라 그런지 뚜껑이 잘 열리지 않는 학생들이 많았다. 남자 미술 선생님도 몇 개를 열다가 금세 지치셨고 못 열고 포기하는 것도 있었다. 그때 소녀의 짝이 안 열리는 색깔을 두고 울상이었다.
" 노란색 필요한데 왜 이렇게 안 열리지... 선생님도 못 열고... 아... 짜쯩나!"
소녀는 옆에 있던 노란색 포스터 칼라 뚜껑을 무심결에 돌렸다.
"쩍" 하는 소리에 반에 있던 학생들은 동시에 소녀를 응시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뚜껑이 안 열리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소녀에게 다가갔다. 소녀는 손쉽게 뚜껑을 열었다. 친구들은 오늘 소녀의 모습을 보면서 무슨 약을 먹었냐고 자꾸 물어봤다. 난감한 질문에 소녀는 아침에 밥을 많이 먹어서 그렇다고 둘러댔다. 이상한 하루였다.
마치고 집에 온 소녀는 배가 무지 고팠다. 그런데 음식을 보면 어제처럼 구역질이 자꾸 올라왔다.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눈으로라도 허기를 채우고 싶어 유명한 먹방 youtube 채널을 틀었다. 온갖 음식이 다 나왔지만 딱히 식욕을 돋우는 음식이 없었다. 그때였다. 컴퓨터 화면 하단에 남자 유튜버가 소고기 스테이크 등심을 rare 상태로 구워 나이프로 자르는 모습이 나왔다. 소녀는 클릭했다. 스테이크 안에서 선 붉은 피 같은 것이 클로즈업되었다. 채팅창에는 스테이크가 덜 익었다고 난리 났다. 평소에 고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 장면을 보자 소녀는 식욕이 뱃속에서 강하게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화면에 저절로 손이갔다. 소녀는 불현듯 불길한 생각이 스쳐갔다. 얼른 책상의 위 노트에다가 최근 있었던 일들을 적어봤다.
햇빛을 보면 쓰러질 것 같음. 어제같이 어두운 날에는 이상하리 만큼 가벼운 몸. 갑자기 세진 근력(?), 평범한 음식을 보면 구역질. 핏빛 스테이크에 식욕 폭발. 이번 달 생리 없음. 그리고 반복되는 악몽에서 나오는 늑개와 안개. 목 쪽에 두 반점. 거울을 보니 창백해진 얼굴빛......
소녀는 소름이 돋았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너무 분명한 단서였다. 입을 벌러 송곳니를 만져 보았다. 커지거나 색은 변함이 없었다. 불안감이 밀려왔다.
'내가 설마 그 뱀파이어 같은 건가...'
웃어 넘기기엔 최근에 너무 이상한 일이 많았다. 소녀는 책꽂이에 꽂혀있는 먼지 쌓인 성경책을 찾았다. 영화에서 보면 뱀파이어들이 성경이나 성수, 십자가가 닿으면 고통스러워한 장면이 떠올랐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손끝으로 조심스레 대어 보았다. 별 느낌이 없었다. 통째로 잡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예전에 엄마한테 받은 십자가 목걸이가 생각났다. 책상 제일 마지막 서랍 잡동사니를 모아둔 상자에 넣은 기억이 났다. 상자를 열어보았다. 빛바랜 황금색 십자가가 보였다. 이번에는 눈을 감고 손으로 확 잡았다.
금속의 찬 느낌 외에는 아무런 고통이 없었다. 다소 안심이 들었다. 하지만 너무 허기지고 아까 보았던 핏빛 스테이크가 자꾸 생각났다. 소녀는 물이라도 먹을 요량으로 거실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여는 손이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 지영아!!!.... 정신 차려..."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온몸이 나른하고 힘이 풀렸다.
'얼마가 지났을까'
귓가에 엄마 목소리와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 최근에 다이어트를 한 적이 있습니까?"
" 아니요, 애가 좀 통통하긴 해도 그런 것 같지는 않네요."
" 아주 심한 빈혈입니다. 보통은 이 정도까지는 아닌데 따님은 좀 심하네요."
" 이런 경우는 성장기 호르몬에 영향을 줘서 잠을 잘 못 자거나 소화기관에 탈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 그리고 과도하게 근육이 이완되거나 팽창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몸에 반점도 가끔씩 생기기도 합니다."
" 그럼 약 먹으면 괜찮아지나요?"
" 네, 링거 맞고 안정 취하고 빈혈약 먹으면 괜찮아집니다. 며칠 쉬면 됩니다. 무리하게 학교 가지 말고 제가 진단서 떼 드릴 테니 3일 정도 집에서 쉬게 하세요."
소녀는 모처럼 기분 좋은 피곤함이 몰려왔다. 이내 모든 생각이 잠 속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