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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덕 Jul 03. 2023

니모나

내 마음의 존재들



니모나(NIMONA) 2023

넷플릭스


굉장한 말썽꾸러기가 나타났다.

빨간 핑크 더벅머리에 얼굴 가득한 장난끼, 쉴 새 없이 통통 튀며 좌충우돌하는 녀석.

그 이름 '니모나'


그래서 내용이 뭐냐?


내용?

어쩌고 저쩌고 어쩌고 저쩌고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이기는 것!






넷플릭스를 실행하니 자동추천으로 웬 애니메이션의 예고편이 재생되었다.

어딘지 디즈니스러우면서 디즈니 같지 않은 작화의 빨간 핑크 머리 악동이 코뿔소로 변신해 신나게 티비속을 좌충우돌 휘젓고 다니는 그 영상은 플레이 버튼을 누르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스토리는 특별한 게 없었다.

남들과 다른 조건을 가진 두 주인공이 합심해 편견을 이기고 영웅으로 거듭난다는 내용은 이미 많이 사용된 뻔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뻔한 이야기가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와 신선하게 전달된다.

어딜 봐도 말썽꾸러기 꼬맹이로만 보이는 니모나와 음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에 늘 기가 죽어있는 발리스터,

그리고 재수 없는 꽃미남 캐릭터.....로 보였던 암브로시우스와의 관계.

중세 기사의 설정을 미래의 세계와 믹스한 배경설정.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니모나.


상식을 파괴하고 평범함을 거부하는 니모나는 빌런도 안티 히어로도, 히어로도 아니다.

그냥 '니모나'이다.

어떤 범주에도 들지 않고 범주 그 자체인 니모나의 짓궂은 표정과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이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렇지만 내가 니모나를 매력적이게 봤던 건 캐릭터와 배경설정 때문만은 아니다.

조금은 독특한 관점으로 보아서이다.

나는 '니모나'를 내가 가진 '내면의 충돌'로 보았다.


편견과 외로움에 맞서고 대립하고 화합하며 엔딩으로 향해가는 그 과정을 어떤 사회적 현상이나 집단의 내재적 성향, 혹은 인간의 어리석음 같은것들 보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충돌들에 대입해서 보았다.

옳고 그른 것, 혹은 선과 악, 혹은 편견과 극복, 영웅과 반영웅 같은 모습보다는



내 자신 속에 존재하는 여러 자아들의 충돌로 보았다.



그래서 '니모나'는 내게 매력적이고 신선하며 조금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자아(self)는 하나가 아니라는 건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많은 과학자, 철학자, 사상가들의 말에 따르면 셀프는 적어도 둘 이상이라고 한다.

혹자는 둘이라고도 하고 셋이라고도 하며 그 이상을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셀프의 개수보다 우리가 내면에 가지고 있는 자아가 단순히 하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내가 니모나를 통해 본 건 내 안에 있는 어떤 세계였으며 니모나에 나오는 인물들 모두 내 안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나의 또 다른 모습들이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세계는 각자의 개성에 맞는 울타리를 가지고 있다.

울타리가 있어야만 우리가 가진 세계가 그 속에서 발전하고 성장해 나가기 때문이다.

경계라는 한계의 설정은 해야 할 것들을 구분해 주고 불필요한 것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 없이 선택한 것에 집중하게 해 준다.

선택지가 적을수록 빠른 결론을 내릴 수 있듯 처리해야 할 범위가 작을수록 훨씬 더 효율적인 처리가 가능하다.

'니모나'에서 나오는 왕국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괴물'을 방어하기 위해 거대한 방벽을 세웠고 그 속에서 1,000년이란 긴 시간 동안 발전과 번영을 거듭 누려왔다.

그 발전과 번영의 원동력은 바로 외부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고 그 틀은 왕국의 방벽이었다.

우리 역시 어느 순간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제한하고 대신 한계 안의 상황에 집중함으로써 사회적 안정과 관계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미 획득한 안정과 관계들은 또 다른 외부 세계로의 확장이나 나아감을 제한하게 한다.

그 바깥엔 '두려움'과 '혼돈'이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괴물'은 장벽 바깥이 아니라 장벽 안쪽에 존재한다.

그것은 늘 우리 곁에 있으며 틈이 생기면 언제든 뛰쳐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장벽을 보다 더 강화하고 괴물을 억눌러 장벽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사실 괴물은 괴물이 아니다.

우리가 상상하고 두려워하는 그런 괴물은 아닌 것이다.

괴물이 우리의 세상을 파괴하려는 건 맞다.

그러나 그 파괴는 모든 세상의 말살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의 도약을 위한 파괴이다.

장벽을 파괴함으로써 두려움 너머에는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려는 것이다.

두려움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걸 알려주려는 것이다.

멈춰있는 모든 것은 변질되기 마련이다.

빛나는 용기도 거룩한 업적도 위대한 사상도 하나의 틀에서만 멈춰있다면 언젠간 그 수명을 다하게 된다.

살아있는 것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들 모두 수명이 있다.

그리고 그 수명은 멈춤이 한계에 달했을 때 끝이 난다.

그래서 살아간다는 건 끝없이 움직이고 움직이는 하나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니모나는 내 안에 있는 무의식의 직관과도 같은 존재이다.

변화무쌍하고 고정되지 않으며 호기심을 가지고 세계를 탐구한다.

발리스터는 내가 가진 도전과 성실, 창의성 같은 고기능적 존재이다.

주어진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세상에 꿋꿋이 맞서지만 그것은 세상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순응하고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기 위함이다.

토드는 내 안의 허영과 질투와 교만이다.

비대한 자아를 바탕으로 타인을 무시하고 비하하며 괴롭힌다.

국왕은 자신의 한계를 조금씩 넓혀가는 이성적 존재이고,

단장은 내 안의 두려움이다.

진실을 허구로 가리고 그 대가로 번영과 평화를 누리지만 결국 두려움에 움츠러들어 편견과 아집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다른 모든 등장인물들 역시 내 안의 고집과 편견을 대변한다.


니모나에서 보여주는 이야기처럼 내 안의 다른 여러 목소리와 감정들도 끊임없이 대립하고 화합하고 밀쳐내고 싸우고 있다.

그 속에서 때로는 발리스터가 이기고 때로는 국왕이 승리하기도 하며 때로는 단장이 승리하기도 한다.

토드가 승리하는 경우도 많다.

니모나가 승리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애니메이션에서 니모나가 승리하기까지는 천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싫든 좋든 우리는 언젠가는 니모나에게 승리의 자리를 넘겨주어야 한다.

천년이 걸릴지라도.

존재하는 모든 건 변화하기 마련이니까.

데미안의 구절을 조금 인용하면

'태어나려는 모든 것은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그리고 우린 매 순간 그 알을 깨고 있다.

알을 깨는 힘이나 알의 두께는 저마다가 다르겠지만 우리는 언제나 늘 알을 깨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알은 결국 깨어지고 말 것이다.


나는

다만 내가 그 변화 속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움츠러들지 않기를 바란다.

훤히 뚫린 장벽의 바깥을 바라보면서도 그 세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면 결국 내게 남는 건 폐허 속 잔해들과 함께하는 것뿐일테니.

그때가 되면 미련 없이 구세계에 작별을 고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하길 바란다.

내 마음은 그렇게 하길 원한다.


아마 원작자나 제작자가 이런 시각으로 스토리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니모나를 보면서 '나 자신의 존재와 한계'가 연결되었다.

그 이유가 어쩌면 내 안의 '니모나'가 세계를 파괴할 기회를 엿보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개인적 관점에서 감상기를 적었지만 '니모나'는 어떻게 봐도 재밌는 애니메이션이다.

편견과 두려움, 사랑과 친절의 시각으로 봐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영화이다.

또는 성장의 이야기로 보아도 좋은 영화이다.


시간이 된다면 꼭 한 번 시청해 보기를 권한다.


something something something something..... We 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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