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동굴, 제자들은 흔들리는 불빛 아래서 스승의 말씀을 필사적으로 옮겨 적고 있었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이 온몸을 적시고 굳어진 몸은 비명을 질렀지만 그들은 꿈쩍 않고 엎드려 사경(寫經)을 해나갔다. 그들 앞엔 낡은 주황색 가사(袈裟)를 두른 노쇠한 스승이 앉아 있었다. 헤어진 가사(袈裟) 사이로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스승은 곧 쓰러질 듯 위태해 보였지만 꼿꼿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세존의 말씀을 암송했다.
사경(寫經)은 오랜 세월 계속되어 왔다.
전쟁과 탄압, 기근 속에서 많은 이가 죽었고 많은 것이 사라졌지만 그들은 결코 사경(寫經)을 멈추지 않았다 세존의 말씀을 좇아 중생을 위한 가시밭길을 묵묵히 걷고 또 걸어왔던 것이다. 이제 남은 이들도 많지 않았다. 세존의 말씀을 기억하는 이도 노쇠한 스승이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가혹한 고행의 시간도 마침내 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차디찬 동굴 속에서 스승은 남은 힘을 다해 세존의 말씀 마지막 장을 노래했고 제자들은 사력을 다해 기록했다. 동굴 속엔 완성을 눈앞에 둔 진리의 노래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그 울림을 깨트리며 동굴 안으로 황급히 달려들어와 소리쳤다.
"큰일 났습니다! 병사들이 산 아래까지 도달했습니다. 어서 피하셔야 됩니다!!"
동굴 밖에서 망을 보던 제자였다. 하지만 다급한 그의 목소리에도 동굴 안 누구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자리에 앉아 완성을 향해 정진하였다.
자신의 절박한 외침이 허공을 맴돌다 사라지자 제자는 초조해졌다. 그렇지만 스승과 동문들을 방해할 순 없었다. 그도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잘 알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발만 동동 구르다 동굴 밖으로 다시 나갔다.
그의 이름은 나슈타카. 까막눈에 똑똑하지도 못했지만 눈과 귀가 밝아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사물을 분간하는 재주가 있는 자였다.
동굴 밖으로 나온 나슈타카는 어두운 산 아래서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시커먼 형상들을 응시했다. 상당한 숫자였다. 형상들은 날카로운 빛을 시시각각 번뜩거리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두 식경? 아니 세 식경? 그 정도면 그들은 필시 이곳을 찾아낼 것이다. 밝은 눈의 나슈타카는 그렇게 짐작했다.
어둠의 무리를 말없이 주시하던 나슈타카는 그들이 내뿜는 쇳덩이의 번쩍거림에 고통을 느꼈다. 지난날이 떠올랐던 것이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던 일이 떠올랐고 부모님과 형제들, 아내와 아이들이 떠올랐다. 지금은 사라진 사람들. 그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전쟁과 기근은 나슈타카의 모든 걸 앗아갔다. 혹독한 날들이었다. 그러나 가장 혹독한 시간은 모든 걸 잃고 홀로 남겨졌을 때 찾아왔다. 어느 날, 산과 들을 헤매다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아무도 없는 숲 속에 쓰러졌다.
그의 인생은 고통이었다. 고통스럽게 태어났고 고통스럽게 살아왔다. 잠깐의 반짝임 같던 행복도 이제는 다 사라졌다. 쓰러진 나슈타카는 죽은 자의 눈을 한 채 꼼짝 않고 엎드려 기다렸다. 마침내 들숨이 멈추길, 아니면 배고픈 짐승이 나타나길. 하지만 들숨이 멎지도, 배고픈 짐승이 나타나지도 않았다. 나타난 건 스승이었다.
스승은 수행의 길을 걷던 중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동안 가만히 앉아 나슈타카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곤 천천히 다가와 그의 얼굴에 붙은 파리와 벌레들을 쫓으며 세존의 말씀을 조용히 들려주었다. 세존의 말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스승의 진심 때문이었을까? 몸도 가누지 못하는 나슈타카는 눈물을 쏟아내었다. 벌써 십 수년 전의 일이다.
나슈타카는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은 상념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그는 품속의 단도를 확인하며 어둠 속에서 점점 더 가까워지는 병사들을 날카롭게 주시했다. 땀이 밴 두 손을 불끈 쥐며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승을 지켜내리라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때였다. 조용하던 동굴에서 갑자기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불길한 예감이 든 나슈타카는 황급히 동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동굴 안은 온통 울음바다였다. 나슈타카는 울고 있는 제자들 중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이보게 무슨 일인가?"
"스승님이.... 스승님이 입적하셨네!"
나슈타카는 황망한 눈으로 스승을 바라보았다. 스승은 가부좌를 튼 자세 그대로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아있었다. 세존의 말씀을 전하던 중 그대로 몸이 굳어버린 것이다. 아주 약간 두 눈을 뜬 채. 그때 사람들의 울음 속에서 누군가 일어나 소리쳤다.
"모두들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시게!!"
총명한 자란 이름을 가진 수제자 수마티였다.
"경전은 완성되었네. 스승님은 마지막 한 마디까지 모두 다 전하시고 떠나셨네. 다들 스승님의 말씀을 잊은 건 아니겠지?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사경(寫經)을 완성한 경전이네. 이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하네. 이보게 나슈타카! 병사들은 어디까지 왔는가?"
"아... 아마도 조금 있으면 들이닥칠 것이네..."
나슈타카의 말에 수마티가 다급히 소리쳤다.
"자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네! 어서 움직이게!!"
수마티의 말에 제자들은 스승께 눈물 어린 합장을 하고 사경(寫經)한 경전들을 전부 챙겨 분주하게 동굴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보게 수마티. 스승님! 스승님은?"
달려 나가려는 수마티를 보며 나슈타카가 말했다.
"스승님의 말씀을 잊었는가? 어떤 경우에도 경전이 먼저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스승님은 이미 각오를 하셨던 게야. 스승님의 마지막 뜻을 거스를 수 없지 않은가. 자네도 어서 피하게나!"
제자들은 앞다투어 동굴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나슈타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에겐 경전도 병사들도 중요하지 않았다. 까막눈의 나슈타카는 이제 갈 곳이 없었다. 마지막 등불이었던 스승마저 잃었기에.
그는 천천히 스승에게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허리가 꺾이고 눈물이 흘렀다. 바닥에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스승과의 첫 만남과 그가 들려주었던 모든 이야기가 생각났다.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아름다운 노래. 나슈타카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마도 그리 오래진 않았을 것이다. 나슈타카의 귀에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개미의 울음만큼이나 작은 소리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스승을 바라보았다. 굳은 줄 알았던 스승의 입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슈타카는 놀라 소리치며 스승의 얼굴에 귀를 바짝 갖다 대었다.
"스승님!!"
"나.. 슈..ㅌ...."
스승의 소리는 너무도 작았다. 나슈타카는 귀를 바짝 댄 채 듣고 또 들었다.
혼신을 다해 스승의 말을 듣고 또 듣던 나슈타카는 이윽고 알게 되었다. 스승은 세존의 마지막 가르침을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작아서 아무도 듣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슈타카여.... 세존... 의 마지막 가르침을 알려... 주어라. 그... 것은 내가 너를 처.. 음 만.. 났을 때 했던 말이니라. 어서.. 늦기 전에...."
그것을 끝으로 스승의 말은 완전히 끊어졌다. 세존이 전했던 마지막 말과 함께 스승의 생명도 다한 것이다. 모든 걸 끝낸 그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나슈타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지막 가르침을 알려야 했다. 그는 스승을 향해 합장한 뒤 동굴을 달려 나갔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지체된 나머지 동굴을 빠져나온 그는 병사들과 맞닥트렸다. 그들은 날카로운 창칼을 번뜩이며 그에게 소리쳤다..
나슈타카는 병사들을 피해 달리고 또 달렸다. 나무사이를 헤집고 가시덤불을 뚫으며 달렸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구르면서도 달렸다. 등 뒤에서 바람을 가르는 화살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갑자기 등 뒤로 둔탁한 느낌이 전해졌다. 하나, 둘, 셋..... 얼마가지 않아 그는 결국 무릎을 꺾으며 절벽 앞에 쓰러졌고 그의 주위를 병사들이 에워쌌다. 쓰러진 그를 향해 병사들은 욕을 퍼부었지만 피범벅이 된 나슈타카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의식이 희미해져 왔다. 병사 하나가 높이 치든 칼이 달빛을 받아 참으로 환하게 반짝이는 모습만이 눈에 가득 찼다. 그는 오래전 숲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때를 떠올렸다. 죽어가던 그에게 환한 빛을 내며 다가온 스승. 칼에 스며 반짝이는 달빛은 그때의 스승과 꼭 닮아있었다. 빛이 떨어져 내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슈타카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나슈타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스승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조용히 떠올렸다.
세존의 마지막 가르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