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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양현 Jan 10. 2019

외할아버지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범이 된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르포르타주

그리운 외할아버지에 대해

제 외할아버지의 청년시절을 브런치에 소개해볼까 합니다. 어릴 적 종종 놀러 간 외갓집, 외할아버지 방의 책장에는 낡은 군용 수통이 하나 들어 있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그 물건이 태평양 전쟁 때 군인으로 참전해서 쓰시던 것이었다고 나지막이 이야기를 해주셨죠.     


태평양전쟁 시절, 외할아버지가 일본군 군속으로 참전하면서 사용한 수통


외할아버지는 원래 국민학교 선생님이셨습니다. 지금의 초등학교는 예전엔 국민학교로 불렸죠. 외할아버지는 지리, 철학, 역사 등등 늘 다방면에 아시는 게 많은 만물박사였어요. 하긴 청년 무렵 대학도 다니셨던 걸 보면, 그야말로 옛날말로 인텔리겐차라고 할 수 있겠죠. 저는 초등학교를 대전에서 다녔는데요. 여름, 겨울방학이 되면 늘 서울에 있는 외갓집에 올라가서 놀았습니다. 그때마다 외할아버지는 저에게 천자문 공부를 시키시며 한자를 떼게 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컴퓨터로 모든 것을 하는 세상이 다가온다면서 제 첫 컴퓨터를 사주신 분도 외할아버지셨죠.      

1930년대 전주공립공업전수학교(현 전주공고) 재학 시절 무렵 찍은 사진으로 우측이 외할아버지, 좌측은 작은 외할아버지입니다.

제 유년의 기억에 큼지막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 외할아버지는 2002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원인은 버거씨병이라고 부르는 희귀한 질병이었습니다. 병을 발견한 의사의 이름에서 유래된 건데요, 쉽게 이야기해서 팔, 다리에 피가 잘 돌지 않아 종국에는 괴사에 이르는 무서운 병입니다. 외할아버지는 눈을 감으실 때까지도, 자신의 병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탐구하고 치료법을 찾아보셨습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외할아버지 앞에서 천자문을 외우던 외손자도 이제 40대 초입에 들어섰습니다. 지금도 서점에서 천자문 책을 우연히 보게 되면 늘 외할아버지가 생각나고 그립습니다.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원고지에 빽빽하게 볼펜으로 작성된 육필원고를 남기셨습니다. 외할아버지는 그 원고를 직접 저에게 보여주셨는데요. 제가 외할아버지를 닮아 글솜씨가 서툴게나마 있는 편이었고 연극영화과를 다녔기 때문에 당신께서 쓰신 글이 저한테 쓸모가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원고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살다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0년쯤 지나서 원고를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 낡고 바랜 원고지에 글을 흘려 쓰신 데다가 한자, 일본어도 뒤섞여 있어 숙독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지만, 저는 읽으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태평양전쟁에 직접 참전하여 겪은 체험담이 종군기자의 르포르타주처럼 생생하고 아주 구체적으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고를 통해 외할아버지가 일본군 병사가 아닌 군속(軍屬), 즉 연합군 측 포로를 감시하는 포로감시원으로 참전했고 일본의 패전 후 되려 포로가 되어 전쟁범죄를 일으킨 피고자 신분으로 재판을 받고 복역하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군부대의 최말단 신분인 포로감시원으로 참전했지만 종전 후 일본군이라는 이유만으로 다시 포로가 되고 전쟁범죄자가 된 드라마 같은 실화의 주인공이 바로 저의 외할아버지였던 것입니다. 식민지 조선인이었기에 겪어야만 했던 가슴 아픈 비극의 역사는 뉴스 속에서만 보던 타인의 이야기가 아닌 제 가족의 이야기로 바뀌었습니다.  

외할아버지가 포로감시원이었던 당시를 회고하며 기록한 육필원고


포로감시원에 대한 연구들

저는 그 후 조선 출신 포로감시원과 전범자를 연구한 책, 논문 같은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나름 공부를 했습니다. 외할아버지에게 배운 한자실력과 서툰 일본어 솜씨로 더듬더듬 일본인 연구자들의 논문들도 훑어보았습니다. 공부를 해보니 포로감시원과 B, C급 전범에 관한 연구나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는 미흡한 편이었습니다. 강제징용자나 종군위안부와 달리 그동안 한국에서 이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은 이유는 강제징용자 이외에 자발적 참전자들이 다수 존재했고, 육체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은 분들과 달리 월급을 받고 포로를 감시하는 공무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양심 상 피해사례를 노출하는 것을 주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포로 상대의 가혹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연합군 측에 기소된 전쟁범죄자로의 낙인 역시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을 겁니다.     


1945년 8.15 해방 직후의 한국은 좌우 갈등으로 혼란스러웠고 일제 강점기 피해자에 대한 처리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몇 년 후에 벌어진 6.25 전쟁을 치르기에 급급했습니다. 게다가 1965년 한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한일협정으로 인해 피해보상에 관한 청구권이 포괄적으로 해결되면서 복잡한 문제들이 일순간에 덮어지게 됩니다. 결국 일제 강점기 피해자 관련 문제들은 1990년대 이후나 되어서야 조명되게 되었습니다.     


반면 일본은 상당한 연구들이 진행되어 있었습니다. 진보성향의 우츠미 아이코((内海愛子) 교수는 조선 출신 포로감시원과 전범 처리 문제에 대해 많은 연구를 진행한 대표적인 학자입니다.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통해 조선인 출신 포로감시원들이 징발된 과정,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사건들, 해방 후 전쟁범죄자로 기소된 이후의 상황을 상세하게 밝혔습니다. 우츠미 아이코 교수의 연구는 한국에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 <적도에 묻히다> 등의 연구서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포로감시원으로 참전하여 외할아버지와 동일한 경험을 겪은 재일교포 이학래 선생님이 벌인 피해자 보상을 위한 법제 활동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전범으로 징역을 산 후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남았는데 피해사례를 외부에 알리고 시민단체와 협력하여 일본 정부와의 접촉을 끈질기게 시도하였습니다.      


조선 식민지 출신의 포로감시원

그렇다면 당시 외할아버지의 신분이었던 포로감시원이 무엇인지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941년 겨울, 일본이 미국의 해군기지가 있는 진주만 공습을 한 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동남아시아는 삽시간에 일본의 점령지로 변합니다. 동시에 영국, 네덜란드, 호주 국적의 민간인을 비롯해 연합군 측의 포로들이 대량으로 발생합니다. 당연히 포로들을 관리하고 감시할 수 있는 인력인 포로감시원의 수요가 당연히 급증했고 조선 팔도에서 약 3천여 명의 청년들이 징발 혹은 자발적 지원으로 차출되었습니다. 가족 가운데 젊은 청년 한 명은 일본군으로 징집되어야 하는 반강제적인 분위기가 존재했고, 4남 3녀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난 외할아버지도 형제 대신 총대를 메고 참전을 하게 됩니다. 이들은 1942년 6월부터 2달간 부산에서 노구치 부대에서 훈련을 받고 8월 부산항을 출발하여 태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각 지역으로 분산 배치됩니다. 일본군 이등병보다 못한 최말단 신분이었지만 2년 만기 근무 계약직의 50엔 정도의 봉급을 받는 이른바 군속이었습니다.      

부산의 노구치 부대 시절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 (한국, 조선인 BC급 전범자 보상 응원 모임 홈페이지에서 인용)

그러나 1년 후 전세가 역전되면서 포로감시원들의 신분은 위태로워집니다. 포로수용소들이 없어지기도 하고 비행장이나 다리를 만들고 도로를 까는 일 등에도 종사합니다. 이 과정 속에서 연합군 측 포로들은 강제노역에 동원되었고 감시원들이 포로를 부리는 과정 속에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 상황은 추후에 조선인 출신 포로감시원들이 전범이 될 수 있는 중요한 구실로 작용합니다.     


패색이 차츰 짙어지면서 당초 2년 근무 계약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군속을 귀국시킬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약속했던 봉급도 제때 나오지 않았습니다. 수시로 진행된 미군 전투기 폭격으로 인해 참호에 숨어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한 나날들이 이어졌습니다. 1945년 8월 15일 결국 일본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했고, 항복선언문은 포츠담 선언 수용이라는 형태로 교묘하게 위장되어 천황의 목소리로 공표되었습니다. 군속들이 일본의 패전을 알게 된 것은 이틀 후 일본어로 쓰인 현지 신문인 자바 신문을 통해서였습니다. 군속들은 곧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고 들떴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망상이었습니다. 포츠담 선언의 10항은 전범에 대해 엄격하게 처리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포로 관리의 당사자였던 포로감시원들은 전범 혐의 피의자로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포로 측 증언에 의해 피의사실이 인정된 이들은 현재 싱가포르의 국제공항이 있는 창이지역의 형무소로 이송되어 수개월 동안 전쟁범죄 재판소에 의해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조선인 포로감시원 148명이 B, C급 전범으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이 중 23명은 사형을 받아 형장의 이슬이 되었습니다. 전체 전범용의자 2만 5,000명 가운데 일본군 BC급 전범 948명이 사형 판결을 받은 것과 비교해서 매우 높은 비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의 운명은 엇갈렸습니다. 형을 살고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간 이도 있었지만 조국은 이들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감옥생활로 생활능력을 상실한 이들은 형기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생활고로 자살하기도 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남은 이들도 있었는데요. 이들은 일본 국적이 인정되지 않아 경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 영화 같은 이야기가 할아버지의 원고 안에 생생하게 녹아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외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사라진 원고로 인해 일부 내용이 빠져 있고, 결말을 짓지 못한 미완성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외할아버지 생전에 원고의 존재를 알았다면 이것저것 관련 사실들을 물어보고 빈자리를 제 나름대로 채워 넣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사무칩니다. 결국 할아버지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몫은 온전히 저의 것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잃어버린 시간을 채우기 위해 외할아버지의 혈육인 외삼촌과 어머니, 이모, 고모할머니의 이야기를 틈틈이 들어보았습니다. 더불어 관련 연구논문, 책들, 다큐멘터리 영상자료 등을 두루 살폈습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일본의 우츠미 아이코 교수님과도 접촉해서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외할아버지처럼 당시 포로감시원으로 근무했던 선친인 안승갑 선생님의 장남인 충청대 안용근 교수님도 저에게 많은 자료를 제공해주셨고 당시 상황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과정을 통해서 당시 외할아버지의 행적을 완성해보려 합니다. 다음회부터 르포르타주로 재구성한 제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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