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이 된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르포르타주
이 곳 말랑에 있는 수용소는 제5분견소라 불리고 포로는 약 5천 명이다. 수용소 주변은 철조망과 암페라(인도네시아산 식물로 짠 거적)가 둘러쳐 있어 외부의 세계는 볼 수가 없다. 우리에게 남방의 모든 풍물이 새로웠지만 서양인들은 특히 낯설었다. 포로들의 국적은 거의 화란인이고 약간의 영국인과 호주인도 있었다. 화란인의 구성은 백인이 절반, 동양계 혼혈인 2세, 3세가 절반 정도였는데, 혼혈도 백인에 가까운 자, 황인에 유사한 자, 짙은 검은색 머리에 누런 피부를 가진 자 등 가지가지이다. 골격도 왜소한 동양계로부터 장대한 서양인까지 다양했다. 가슴의 털이 시커멓게 나 있어 원숭이처럼 보이는 이들도 상당수다.
선배 포로감시원의 이야기처럼 이들의 공통점은 겉으로는 잘 순종한다는 것이다. 일본군의 군기에 어느 정도 익숙한 탓인지 경례와 차례 자세도 능숙하다. 하루 두 차례의 점호는 일본어로 진행한다. 포로로 잡힌 장교에겐 명색의 봉급도 지급되며 사병에겐 간혹 약간의 노역도 동원할 수 있다. 그러나 의복은 거의 지급되지 않았고 거의 반나체에 가까운 생활이다.
이들에게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급양 즉 음식이다. 날마다 세끼를 먹여야 했는데 빵과 우유가 중단된지는 한참 되었고 질이 떨어지는 하등미로 죽을 쑤어 먹어야 했다. 영양은 사활이 걸린 문제다. 이들은 전처럼 잘 먹고 잘 살날이 하루빨리 오길 기대하지만 그 날이 언제 올진 아무도 모른다. 가끔 항의나 진정을 하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다. 분견소의 소장은 목석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날이 갈수록 피하지방은 얇아지고 낯빛도 바뀐다. 매일 보는 감시원들에게 뭔가 기대하긴 어렵다. 포로 입장에선 감시원들의 횡포만 없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포로들은 매일 한두 소대씩 외부의 작업장에 나갔는데 가는 도중에 자전거를 탄 여자들과 청년들을 지나가곤 한다. 이들은 살짝 손가락을 들어 포로들에게 뭔가 신호를 주거나 쪽지 등을 전했다. 이 모습을 목격한 감시원들은 포로들이 귀대할 때 정문에서 호주머니 검사를 했다. 밖에 나가선 부녀자들을 쫓아도 보았지만 우리들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는 더욱 과감하게 행동했다. 부녀자들, 청년들을 죄다 잡아서 수용소 앞 정원에 한두 시간씩 무릎을 꿇려놓고 돌려보낸 것이다. 체벌을 몇 번 반복하자 이들은 수상한 행동을 그만두기 시작했다.
포로가 아닌 일반인들은 자기 집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한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생계수단이 없어져 버렸다.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가구나 패물을 팔기도 했는데 그것도 군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언제든지 징발되었다. 어느 날 우리는 가옥 하나를 접수했다. 넓고 아늑해 보이는 양옥이었다. 원래 이 집에 살고 있던 여인들과 아이들은 우리로 인해 살던 집을 떠나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으로 합류했다.
우리가 접수한 집은 청소가 잘 되어 있었다. 응접실 탁자 위와 몇 군데에 꽃병이 놓여 있었다. 꽃병엔 방금 새로 간 물이 담겨있었고 꽂혀있는 꽃도 새 것이다. 나는 이 모습을 보고 집주인들이 정말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들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이사를 갈 때도 지저분하게 나가기 일쑤인데, 하물며 적군에 집을 빼앗겨 쫓겨나는 처지인데도 집을 잘 정돈하고 떠난 모습이 선량하다. 아니 어쩌면 이해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