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양현 Jan 10. 2019

우리는 남방으로 간다

전범이 된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르포르타주

부산발 포로감시원 수송선

1942년 8월 19일 부산항을 떠난 후, 벌써 일주일이 되었다. 일본 규슈지역 나가사키에 잠시 정박했고, 여러 척이 다시 선단을 짜서 남진한 것이다. 우리들의 선단은 타이완 섬과 중국 대륙의 사이 타이완 해협을 항해하고 있다. 누군가 말한다. 타이완의 북쪽에 있는 타이베이(臺北)에서 남쪽 타이난(臺南)까지 기차로 가면 네댓 시간이 걸리지만 이 배처럼 느리게 간다면 하룻밤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

부산에서 출발한 조선인 포로감시원 수송선의 행로

지난 일주일의 항해는 정말 악몽이었다. 현해탄의 파도는 매우 거칠어서 항해를 처음 경험하는 우리들은 심한 뱃머리를 앓고 여러 끼니를 먹지 못했으며 그나마 먹은 것도 죄다 게워냈다. 선실과 갑판 사이를 오르내리면서 우몽좌몽 견디어내는 게 우리의 신세였다. 하지만 동중국해를 겨우 벗어나니 바다도 잠잠하고 배에도 다소 익숙해졌다.


수일 후 밤 자정쯤에 홍콩에 당도했다. 서양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거라고나 할까. 눈앞에는 큰 산들이 보이는데 거대한 빌딩처럼 온통 전등불로 장식되어 있다.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하여도 산꼭대기에 집짓기 좋아하는 영국인들이 중국인이 끄는 가마에 탄 채로 집을 오르내렸다 한다. 지금은 용맹한 일본군의 진격에 밀려서 남쪽으로 도망쳤다. 인도로 갔을까? 본국으로 돌아갔을까? 듣자 하니 필리핀에 주둔해있던 미군은 호주까지 달아났다고 한다.


작년 겨울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새벽, 일본의 폭격기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고 미태평양 함대 대부분을 섬멸하였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영국 함대를 격침하거나 축출하였다. 이렇게 기세 등등한 일본군이지만 지금 이 선단은 혹시 모를 잠수함의 위협에 대비하여 호송함 전후좌우에 배치된 군함들이 호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비행기도 가끔 기지에서 날아와 선단을 둘러보고 돌아간다. 배와 배에서 신호기를 든 기수가 절도 있게 깃발을 내저으며 신호를 교환한다.


선단은 30여 척이나 될까? 2열 종대로 나아가는데 맨 처음과 후미의 배는 보이지 않는다. 배마다 군인을 콩나물시루 마냥 싣고 군수물자를 만재하였다. 돌아올 때에는 남방의 온갖 보물과 군수품의 자료 같은 것을 가득 싣고 지금처럼 선단을 지어서 돌아오리라.


남중국해의 기나긴 항로

우리 선단은 남중국해의 기나긴 항로를 밟고 있다. 속력이 제일 느린 배에 맞추어 가야 했기에 자전거의 속도인 시속 10노트나 될까. 날마다 해는 바다에서 뜨고 바다에서 진다. 태풍과 폭풍의 위협은 벗어났으니 적의 위협만 없으면 안전하다고 누군가 말한다.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거대한 환풍기가 바람을 불어넣고 있으나 워낙 인원수가 많아 식사를 할 때면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땀방울이 밥그릇에 그대로 뚝뚝 떨어지지만 잽싸게 먹어치우고 빨리 간판으로 뛰어올라 바깥바람을 쐬는 게 일과다. 쌀밥은 구경한 지 오래다. 우리가 날마다 먹는 건 빨갛게 얼근 호박으로 쑨 호박죽이다. 밤이면 갑판 위에 누워서 “야 이 징그러운 외호박 그만 먹여!” 하며 발로 호박 덩이를 차기도 했다. 어느 날은 뱃전에 널빤지를 대고 그 위에 흰 배에 싸인 기다란 물체를 밀어서 바다에 내려뜨리는 것을 봤다. 곁에 서있는 몇 명의 선원들이 고개를 숙이고 묵도를 한다. 수장을 하는 것이다.


전쟁터에 가기도 전에 바다 한가운데서 영면을 하다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래도 잊지 말자. 우리는 지금 새 출발을 하는 것이다. 일본인 군인이나 조선인 군속이나 다 같이 미지의 세계 남방으로 간다. 목적지에 닿으면 서로 분산될 것이고 그 임무에 따라 활동에 따라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한 운명을 가진 통조림 속의 알알이다.


배의 마스트 꼭대기에는 가끔 해조가 날아와서 앉는다. 끝도 없는 바다인데 저 새는 어디서 날아왔다 어디로 가는가. 뱃머리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상어 한두 마리가 배와 경주하듯이 따라간다. 만일 파선이라도 되어 바다에 빠지는 날이면 상어밥이 될 것이다. 9만 리 장천을 홀로 가는 우리는 가끔 비상훈련도 한다. 구명 통을 어깨에 걸어 메고 빠른 시간에 뱃전까지 올라와서 바다에 뛰어드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육지가 보인다!

“육지가 보인다!” 누군가 소리쳤다. 정말로 머나먼 곳에 산이 보였다. 우리의 배는 잠시 항구도시 사이공에 도착하고 수백 명의 동료를 내린 후에 다시 출발한다. 나는 이들에게 “안녕을 빈다. 반드시 살아 돌아오자!”라고 중얼거렸다.


배는 다시 기나긴 항로에 돌입한다. 어쩌다 비바람이 치는 날이면 배는 제법 동요한다. 3,4천 톤 급 화물선인데도 전후좌우로 많이 흔들린다. 그러나 이제 익숙해진 덕분일까? 뱃멀미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밤이면 머나먼 하늘에 약간의 달빛만이 있을 뿐이다. 눈 앞에 보이는 검은 구름과 술렁이는 바다의 꿈틀거림은 악마와 해룡의 키스가 아닐까? 어둠 속에서 배의 기계소리와 우리의 여로만이 여전하다. 내가 지나갈 내일 밤의 이 바다도 여전하다면 조물주는 무슨 목적으로 이러한 오묘를 만들었을까.


낮이면 선실의 더위에 시달리다가 구름덩이와 함께 쏟아지는 스콜이 먼 곳에서부터 다가온다. 급히 옷을 벗고 수건에 비누칠을 한 후 오랜만에 땀과 때를 문지르고 있는데 스콜은 다른 곳으로 금세 지나가버린다. 별수 없이 바닷물로 몸을 씻어냈다. 하지만 소금기가 끈적끈적하여 기분이 좋지 않다.


싱가포르에 도착하다

육지를 떠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섬이 가까워지면서 야자수와 조그마한 언덕 위에 깨끗한 양옥 잘 정리된 새파란 정원이 멀리 보였다. 소남도(昭南島) 즉 싱가포르 항구 어귀에 들어선 것이다. 널따란 항구를 슬쩍 살펴보았다. 일본군 폭격기의 폭탄을 맞아 반쯤 침몰된 부분, 머리는 물속에 처박고 등을 보이는 배들, 반파된 부두의 창고처럼 어수선한 모습들은 전쟁이 벌어졌음을 예측케 했다.


바다 위에 떠있는 부표 주변을 훑어보았다. 멀리 가까이 떠있는 큰 배들 만해도 대충 100척은 넘는다. 가히 대항구다운 규모다. 모든 배들은 기나긴 여로에서 이제 엄마 품으로 돌아와 휴식하고 바다도 잔잔하기만 하다. 이따금 정중하게 한 번씩 울리는 고동소리는 이제 동남아의 보고에서 진귀한 사탕과 고무와 기름과 광물을 가득 싣고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신호다. 고동소리가 기나긴 위험한 항로(航路)를 앞두고 자식을 부르는 엄마의 울음소리처럼 느껴지는 건 나뿐일까? 그래서 서양인은 배를 ‘여성(She)’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인도는 영국의 젖줄이라고 한다. 동남아도 영국, 프랑스, 화란(네덜란드), 포르투갈의 젖줄일 것이다. 일본, 독일, 이태리는 젖줄 없이 고달픈 엄마젖만으로 자랐다고 해야 할까? 3국이 동맹하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자며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지만 본래의 속셈은 자신들의 젖줄을 만들자는 것일 게다.


부두에는 시커멓고 키가 크며 몸이 가느다란 인도인 쿨리(20세기 초반 인도, 중국 출신 노동자를 일컫던 말)들이 벽돌을 쌓아 올리며 부서진 창고를 고친다. 배에 짐을 싣고 내리기도 한다. 머리와 몸의 상반신에 때 묻은 흰 천을 걸치고 있는 것이 그들이 입은 의복의 전부다. 무릎은 드러나 있고 신발은 아예 신지도 않았다. 누군가가 고함치며 장대로 밀어붙인다면 그들은 삼 줄기처럼 쓰러져 버릴 것도 같다. 몹시 허기져 보이는 그들이 어떻게 중노동을 할까?  글자 그대로 고력(苦力)이다. (쿨리는 한자로 苦力이라고 표기된다)


현지인 하나가 노를 저으며 우리 배 밑으로 바짝 다가와서 깡통처럼 보이는 것을 치켜들고 손가락을 두세 개 벌려 보인다. 위에서 누군가 노끈에다 돈을 달아서 내려 보냈더니 그 사람은 물건과 가전을 올려 보낸다. 배에 담긴 물건을 전부 팔아도 얼마나 남는 것이 있을까 의심이 간다. 우리 중 일부는 이 곳 싱가포르에 남았고 나머지는 이 배에서 내려 큰 배에 옮겨 탔다. 항해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이전 01화 외할아버지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