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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양현 Jan 10. 2019

우리의 정체, 포로감시원

전범이 된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르포르타주

파죽지세의 일본군

여기서 잠시 당시의 세계 정황과 우리의 정체 포로감시원에 대해 밝혀두고자 한다. 조선을 집어삼킨 일본은 국력을 키워오다 몇 년 후 만주를 침공하여 만주국을 세웠다. 하지만 국제 여론이 좋지 않자 국제 연맹을 아예 탈퇴해버린다. 1937년에는 지나사변(일본의 침략으로 일어난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에 침입하였다. 뜻밖에 지나사변이 지지부진하게 흘러가자 종전을 위한 탈출구를 모색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못했다. 한편 유럽에서는 독일과 이태리가 전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는 전쟁에 열중했고 일본은 이들과 3국 동맹을 맺었다. 일본은 지나사변이 장기화된 것이 영국과 미국의 장개석(蔣介石, 장제스, 항일운동을 벌이던 국민당의 정치가, 후에 대만의 국부가 됨) 원조와 일본에 대한 금수조치에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일본은 다시 한번 일전을 일으켜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후 동남아를 석권하였다. 


필리핀에서 전투 후 잔류 미군을 포로로 잡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태국에는 무혈입성하였다. 말레이시아에서 영군과 일전 후에는 많은 포로를 사로잡았고 거점 싱가포르 함락의 대축제를 벌였다. 동시에 버마를 침공하여 인도 국경이 전선이 되어 버렸다. 연이은 전승과 점령지 확장에 따라 적군 측의 포로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남으로는 바다 건너 호주가 넘어다 보이고 동으로는 태평양의 깨알만한 섬들이 쟁탈전의 대상이 되었다. 

태평양 전쟁의 초기판세, 일본이 동남아지역을 석권한 상황이다 (https://en.wikipedia.org에서 인용)


거듭하는 전승에 일본은 들떠있다. 이제 점령지에 철통의 진을 치고 적의 침입을 무찌르면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이 되는 것이다. 서양인과의 전쟁은 이미 명치(明治) 37~38년(1904~1905년)에 러일전쟁으로 경험한 바 있다. 일본은 신의 가호를 받는 나라, 천황은 현신이 되었고 군은 무적의 황군, 황국신민은 일등국민이 되었다. 따라서 조센진(朝鮮人)과 시나진(중국인)은 경멸의 대명사가 되고 한때 문명인 운운하며 배워오던 서양은 쇄국 막부시대의 게도(한자로는 下等, 일본 다음의 2류 하등국을 뜻함)로 돌아갔다. 


우리의 정체, 포로감시원

대량으로 늘어난 게도의 포로들을 조센진(朝鮮人)에게 맡기는 이유는 몇가지로 정리된다. 우선 일본군 병력을 전투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포로감시업무는 전투행위가 아니므로 훈련을 받은 일반인이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둘째는 포로와 일본군 간의 일상 교접 속에서 생길지도 모를 불미한 사건에 대해 포로감시원을 앞세워 변명과 회피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즉 포로가 사망했다면 그것은 포로감시원 조센진의 잘못이지 황국신민의 병사가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우월한 민족으로 찬미했던 백인들을 포로로 잡은 일본군을 직접 목도하게 하여 일본의 위세를 선전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당시 매일신문에 실린 군속 채용에 관한 선전기사

조선 팔도에서 행정기구를 통해서 장정 3천 명을 모집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었다. 지원병도 아니며 상당 봉급을 주는 군속이고 근무기간은 2개월 간 부산에서의 강습 후 현지 근무 2년 만기였다. 모집된 이들은 20세 내외 27~8세 미만의 장정들이었는데 내년부터 조선에 중병령을 실시한다고 예고되었으니 젊은이들은 그것이 두려워 미리 자원했을 것이다. 조금 나이가 있는 이들은 강박하게 몰아오는 전시체제와 동원령으로 억압된 국내 생활을 벗어나 해외에서 웅비를 꾀하려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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