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이 다 이러하리.
꽃이 피었다. 흰꽃. 꽃잎은 다섯 장으로 보이는 듯하지만 개나리처럼 통꽃이다. 달팽이 더듬이 같은 수술은 다섯 개. 암술은 보이지 않는다. 안쪽 어디쯤에 있는 모양인데, 개미 한 마리가 부지런이 드나든다. 꽃봉오리에서 하루만에 꽃이 터졌으니, 내일쯤 활짝 피면서 암술이 드러날지도 모르겠다. 개미한테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기다리자.
볼수록 대견하고, 반갑다. 콩을 심은 게 몇 해나 된 옛일이었나. 꽃은커녕 매해 겨울이면 생명부지도 걱정이었다. 사람이야 전기장판으로 그럭저럭 견디겠지만 더운 동네서 태어났을 녀석은...
주먹만 한 화분에서 시작했다. 그래서 더욱 콩에서 새싹을 틔워 올릴 때부터 감동은 시작이었다. 숲 속에서 도토리 한 알이 힘겹게 싹을 틔우는 모습을 본 언젠가처럼. 나무를 집 앞 화단으로 옮겨 나름의 '야생'의 경험을 시키기도 했다. 그곳에서 감나무의 튼튼한 뿌리, 수많은 실낱처럼 퍼져나간 도라지 뿌리와도 만나면서, 꽤 놀라기도 하였으려나. 겨울이 오면서 다시 큰 화분으로 옮겨 집으로 들였다. 화분이 커지면서는 이 작업은, 정말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는 바탕을 옮기며 몸살을 앓은 나무에 비하면, 그 일쯤은 사소한 것일지도 모른다.
영양실조로 의심된다며, 언젠가는 돌팔이 의사처럼 진단하기도 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흙과 거름 일대일 처방을 내리기도 하고. 그닥 바른 처방전이 아니었다고 실토해야겠다. 하지만 성의를 알아차렸는지 강한 의지가 있었는지, 나무는 곧 기운을 내고 반짝이는 잎을 새로 만들어 올렸다. 가끔 잎이 마르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싱싱하고 건강하다. 새봄 잎눈이 터지면서 밀려 나오는 층층나무 이파리처럼 반지르르 윤 나는 그런. 점점 키가 자라면서 아래쪽은 제법 목질화, 단단한 나무 같은 테가 났다. 저 안에도 나이테가 들어 차 있겠지? 나무가 나이테를 만드는 원리로 보자면, 뭔가 헷갈린다. 겨울에도 실내에서 잘 자난 편인데. 일년내내 생장하는 열대의 나무들은 나이테가 없다지 않은가.
나이테가 만들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사람의 욕심이 점점 자랐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아니 손톱만한 콩에서 시작한 저 생명이 더 많은 잎을 틔우고 나무의 몸을 만들어갈 때, 우리가 꽃을 소망하게 되었으니까. '꽃을 보아야지' 하면서. 그렇게 해서 꽃을 본다. 지구 저쪽 어디쯤에서는, 커피농장에서 떼로 피어나는 흔하디 흔한 꽃이겠지. 하지만 우리 집 화분에서 피어난 몇 송이는 큰 감동과 위안이다. "좋은 일이 있을 모양이야" 우리 꽃을 보고 동네 아주머니는 희망을 주고 갔다. 그래. 꽃을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이 다 이러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