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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andol Aug 11. 2017

입추 지나고 말복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춤을 춘다.

정기적으로 숲에 들어오다 보니, 그때마다 조금씩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더위가 한풀 꺾이는 지금이 그렇다. 뙤약볕의 강도가 약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살짝 돌아서는 모퉁이에 부는 바람에서도 얼핏 가을 냄새가 난다.

나무인지 헷갈릴 정도로 기세 좋게 자란 미국자리공과 구릿대, 왕고들빼기 같은 풀도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하다. 그렇다고 다시 도약을 위한 잠깐의 휴지기 같은 건 아니다. 이른 듯하지만 벌써 올해를 마감할 준비다. 시간은 풀들 앞에서 유난히 빨리 흐른다.

얼마 전에 산 장난감에 벌써 흥미를 잃은 아이처럼, 풀은 시들해진다. 줄기에 힘이 빠지고, 채도가 옅어진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변하겠지만, 어느 날 아침에 문득 발견할 것이다. '아! 가을이네' 하고, 혼잣말과 함께.

장마의 센 빗발과 넘치는 강물에도, 주눅은커녕 더 푸른 탄력을 내보이곤 했던 버드나무. 개버들, 키버들, 호랑버들, 능수버들... 또 봐도 종류를 분간하지 못한 버드나무 잎도 입추의 신호에는 겸손하다. 물이 빠지자마자 아주 조금씩 머리숱이 줄어드는 걸 스스로는 알고 있었겠지.

비를 보낸 '나도개피' 열매에 올인한다.

무성한 이파리를 만들어 하늘을 뒤덮은 나무도 속도조절에 들어간다. 잎을 키우기보다는 열매가 걱정이기 때문. 자라는 건 그만하고, 늦여름의 햇살에 몸을 맡긴다. 수많은 열매들을 챙겨야 할 때란 걸 안다.

수없이 많은 도토리를 건사하느라 산갈나무는 잎이 마르고 갈색으로 변하는 건 돌아볼 틈이 없다. 반짝이며 푸르른 이파리는 미련도 없이 잊었다는 듯. 물과 햇빛과 탄소만으로도, 다람쥐와 멧돼지를 살찌우는 도토리를 만들어내는 마술.

그러고 보면 얼마나 지치게 했던가. 하지만 더위는 식물의 열매를 튼실하게 하는 일등공신이었다. 너도나도 입추가 지났다며 인사를 건네는 동안, 여름의 추억을 힘겹게 담아낸 열매가 단내 또는 단내를 풍긴다. 어느 것이든 향기로워라.

'참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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