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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andol Aug 12. 2018

여름 숲, 푸른 하늘과 작은 꽃  

평화누리길 9길, 경기도 파주 파평면 면사무소부터 솦 속 자연관찰

사상 최고의 폭염 속에 하루 몇 명이나 이 길을 지날까. 파평면사무소 길로 들어서서 끝까지 가면 더 길이 있을까 싶은데, 이정표가 반갑다.  "어서 오세요. 엄청 더워요. 이제 곧 그늘이에요~"  시멘트 바닥 좁은 흙 속에서 어렵사리 싹을 틔운 미국가막사리가 반갑게 맞는다. 평화누리길이다. 정확히 말하면 평화누리길 제 9길. 짧지만 긴 이 길 한번 따라가 보자. 갈 때까지만.


작은 것을 발견할수록 커지는 기쁨

미국가막사리의 인사를 받으며 직사광선의 난사에서 벗어나 그늘인 안전지대로 들어섰다. 한여름 기세등등한 나무의 성장은 사람이 자주 다니지 않은 이 길을 숲으로 만들었다. 여름이라 크고 화려한 꽃들은 볼 수 없지만, 주의를 기울이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 파리풀, 털별꽃아재비, 산층층이 같은 풀의 작은 꽃들이다. 여뀌도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하늘의 빼곡한 수관 때문에 빛이 잘 들어오지도 않지만, 미꾸리낚시, 노란물봉선 같은 녀석들도 싱싱하게 잘 자란 건 이곳이 습한 지역이란 소리다. 비가 오거나 하면 주위 어디쯤은 얕은 물길이라도 생길 모양이다. 미꾸리낚시의 줄기를 감싼 잎의 세련된 곡선에 눈길을 주고 땅바닥을 내려다본다. 눈높이를 대폭 떨어뜨려 바닥까지 내려가면 아주 작은 노란 꽃이 있다. 좀고추나물과 큰석류풀. 작은 것을 발견할수록 기쁨이 더 커지는 순간.  

(상하, 좌에서 우) 파리풀, 좀고추나물, 털별꽃아재비, 노란물봉선, 산층층이, 미꾸리낚시

이제 가을이네

위쪽으로 오르자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흙길이 나타나고 위로는 나뭇잎 사이 하늘이 파랗다. 나무 그늘을 벗어나자마자 둘레길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하늘을 쳐다보니 눈이 부시다. 햇빛을 원망하는 말이 아니라 푸른 하늘에 둥둥 뭉게뭉게 구름이 멋지다는 말. 물론 등짝으로는 땀이 비 오듯 흐르지만, 풍경은 가을의 그것이다. 텔레비전 화면의 소리를 끄고 그 속의 모습만을 관찰할 때 느끼는 그런 느낌. 누군가는 시원한 에어컨을 켠 자동차 속에서 편안하게 이 풍경을 보고, "이제 가을이네" 하며 성급한 계절 이야기 나누었을 테지.


가을에 다시 오마

무더위 속에서 제 색을 드러내지 못한 입추가 이렇게 해서라도 제목소리를 내는 건가 하고 생각할 때, 길 위에 느닷없이 나타난 벤치 하나. 들리지도 않는 입추의 목소리를 옹호하는 강력한 증거인 듯. "쉬었다 가세요~" 이렇게 유혹하지만, 천만에. '너 같으면 앉고 싶겠어요? 40도에 육박하는 기온에다 난 지금 빨래를 걸치고 있다고요. 얼른 이 뙤약볕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뿐이야!' 그래도 둘레길 풍경의 완성도를 높인 데는 우선 한 표 주마. 선선한 가을바람 부는 어느 날 앉아주마. 기다리고 있어.  

불공평한 세상

혼잣말을 하며 걷다 보니 길가엔 밤나무, 떡갈나무, 백당나무가 잘 보이고, 초피나무와 딱총나무 어린것들이 있다. 팔랑팔랑, 이 길을 배경으로 흰나비 두 마리가 대낮의 뙤약볕 아래서 연애하는 중이다. 내가 다가가면 도망간다. 당연하겠지. 누군가는 신나게 연애할 때, 거미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려 발버둥 치는 애벌레도 있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해. 다시 그늘 길, 근처 나뭇잎 위에는 매미 한 마리가 벗어놓고 간 옷이 국군 용사의 동상처럼 빛난다. 쥐깨풀 잎 위에 누군가 생산한 것인지 알들이 가지런하다. 이 중에 과연 몇이나 태어나 살 수 있을까.

 

쥐깨풀 위에 알, 매미, 쉽싸리, 장대여뀌, 매듭풀, 고추잠자리

질경이 바다에 핀 꽃

뙤약볕을 받으며 걷다, 다시 숲 속 그늘로 들어서며 숨을 크게 내쉰다. 이번엔 밟아도 밟아도 끄덕 없이 잘 자라는 질경이 밭이다. 질경이란 '동물이나 사람이 밟아, 그 아래 끈끈한 씨앗을 달아 멀리 번식하는 식물'이라고 배운 바, 어쩌면 밟아주기를 원했을 텐데 이곳에서는 이처럼 '곱게' 자랐다. 길을 덮은 질경이가 주위 초록의 배경과 함께 어울려 깊은 숲 속 공간을 만들어냈다. 질경이의 바다 주변에 쉽사리가 사선으로 들어오는 빛을 받아 더욱 날카롭게 거치의 날을 세우고 있다. 누구나 이런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 동글동글 선괴불주머니 잎의 모습도 정말 예쁘잖아! 뿐만 아니다. 고마리, 쥐손이풀, 살갈퀴, 짚신나물... 여름을 피우는 녀석들.

쥐손이풀, 선괴불주머니, 고마리, 살갈퀴, 바디나물 잎 위에 거미, 질경이 밭

산호랑나비, 안녕~

이렇게 짧고도 긴 여름 길이 끝나고 나니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다. 숲과 도로 사이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여름 숲이 그걸 가렸을 뿐. 그래서 사계절 다 겪지 않았다면 숲을 말하지 말라고 누군가 이야기했지. 도로를 따라 조금 가다 길은 다시 산 위쪽으로 향한다. 길 따라 계속 가면 아마 율곡습지공원이 나올 텐데. 여기와 비교하면 나름 광활한 그곳은 공원으로 개발되어 정자를 비롯 앉아 쉴만한 그늘도 많고, 작은 가게, 식당도 있다. 오늘은 이만. 도로로 빠져서 여름 숲에서 탈출한다. 멋진 하늘과 구름을 배경으로 자동차들이 생생 달린다. 무단횡단, 잠시 동안 함께 했던 산 호랑나비 한 마리와도 이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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