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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andol Sep 16. 2018

막걸리 한 잔 없는 덕진산성에서

봄가을로 덕진산성에서 이런저런 생각   

봄에는 푸른 하늘 아래서 갈참나무 새순이 솟아나고, 나도국수나무 초록 잎 가득했다.

물론 가끔 보랏빛 붓꽃, 노란 참나리, 무섭고 아름다운 투구꽃, 우아한 눈빛승마도 반겼다.

여름이 되자 칡과 단풍잎돼지풀이 초록색 페인트처럼 사변을 칠해 버리고

이제 그것들도 가을을 알아차려, 색이 한풀 꺾였다.

어지간한 나무들은 자랄 수 없도록 햇빛을 막아버린 칡덩굴을 헤쳐보니

그저 뒤덮은 게 아니라 속에는 그야말로 집착이 있었다.

나무들을 바짝 감아쥐고, 위로는 커튼 같은 장막을 친 것이다. 

참 집착은 무섭다. 살려는 건지, 죽이려는 건지.


그 낭떠러지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은 그래도 매우 아름답다.

푸른 임진강물을 사이에 두고 사람이 살지 않는 초평도 땅이 덩그렇게 앉았다.

섬이라지만, 적잖이 커서 높은 산성에서 바라도 보아도 뒤편 강물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상한 구글 지도는 공중에서 보고 다알랴줌. 강물이 만든 역학적 구조물, 그러니까 초평도는 삼각주다.

표주박 모양으로 생긴 덕진산성, 그 앞으로 내려다 보이는 쪽이 삼각형의 한 변이다.  

초평도는 이제 천이의 초반전이다.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에 이 섬이 없다. 

디테일하고 부지런한 발걸음과 관찰로 지도를 만든 그다. 

 바로 성 앞에 있는 이 정도 사이즈의 땅덩어리를 빠뜨리진 않았을 거다.

때문에 아마도 이후에 섬은 모양새를 갖추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연하겠지만, 한국전쟁 때 포탄 세례로 섬에 살던 것들은 박살이 났다.

지뢰가 촘촘하게 박힌 그 땅에서도 식물은 자라났는데, 

한 십여 년 전에 박격포 피탄에 불이 나 상당이 타버렸다.

그때부터 또 새로 천이가 그때 시작된 거다. 자연은 계속 천이를 거듭한다. 

극상의 단계를 이루었다고 한들, 그건 46억년 지구의 나이에서 보자면 말 그대로 climax(극상)이다. 

우리 삶이라는 게 사는 동안 수많은 클라이맥스로 점철되듯이 자연도 그렇다. 

당연히 작은 풀(기수역이란 특성상 이 풀도 염생식물 주로 될 듯)이 머리를 들고, 이어 버드나무가 나타났다.

지금은 그럭저럭 푸른 버드나무 숲이 작게 조성되어 있고, 안으로는 아까시나무도 보인다고 한다.  

점점 육지가 되고 있다는 증거다.   

땅주인에게는 호재다. 이제 DMZ의 철책이 걷히고, 부지런히 지뢰만 걷어내면 된다.

물론 생전에 돈이 될지 장담은 못하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건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임진강은 흐른다. 덕진산성과 초평도 사이로 유유히 흐른다. 

강 위로 가끔 고깃배를 볼 수 있다. 이곳 기수역에서만 사는 황복이나 참게를 잡는 허가된 어선이다. 

지난여름 몇 번인가 그 어선들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면서, 짧은 세월을 낚은 적이 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저만큼에서 강이 끝나는데,

이곳에 흔한 된장잠자리가 되어 강을 따라 좌로 올라가면,

당신은 한탄강을 만나고, 계속 더 가면 휴전선을 넘게 된다.

무려 7,000km를 날아 한반도로 온다는 된장잠자리의 가공할 비행능력을 생각한다면

한강의 반밖에 안 되는 길이인 그깟 250km쯤이야 눈 감고도 가고말고.

기수를 우로 돌린다면 상황은 좀 다르다. 한번 가볼만하다.

한강과 마주친 다음에 강화도 거쳐 빠져나가면 서해바다가 기다린다. 

언젠가는 중국과 붙은 땅이었다는 서해를 지나 대륙으로 날아가고 싶을 거다. 

강이 바라보이는 사변에는 자랄 대로 마구 자란 단풍잎돼지풀이 칡과 함께 도배했다.

이놈의 줄기 아래쪽을 보면 나무라고 해도 믿어야 할 것처럼 두텁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풀이라, 내년을 도모할 방법을 찾아본다.  

점처럼 노란 꽃이 빼곡히 들어찬 꽃대를 무수하게 피워 올린 것이다.

이걸 건드릴 때마다 마른 꽃가루가 먼지처럼 날린다.

얼마나 들이마셨는지, 봄마다 괴롭히는 비염이 가을을 앞두고 도진다.

이 꽃가루를 탈탈 털어다가

"한 두어 큰술 넣고, 달콤한 시럽을 한번 짜 넣은 다음에 흰 우유를 넣고 잘 섞으면

맛있는 라테가 완성됩니다. 얼마나 맛있게요~"

급조한 이 레시피대로, 쭉 들이키면 거의 사약이 될 것이란 황당한 생각이다.


단풍잎돼지풀과 칡이 뒤덮인 사변은 원래 갈참나무 군락이었다.

조망을 좀 좋게 해보고자 해서, 수년 전에 다 베어냈다고 한다.

멀리 강 쪽에는 베어내지 않은 갈참나무 군락이 아직 멋있게 남았다.

베어 나자빠지던 그 해도 갈참나무는 제 할 일을 다했다.

적지 않은 도토리들을 떨어뜨려 놓았던 것이다.

그것들이 올봄 손가락만 하게 올라왔다. 그러던 것이 지금 내 무릎만큼 자라났다.

한해를 견뎠으니 우선 안심이다. 올 겨울을 견디기만 하면 된다.

올겨울 지난다고 해도 막막할 것으로 예상되는 나보다 낫다.  

도토리처럼 장기간 견딜 수 있는 열매형 씨앗의 능력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참나무류처럼 적은 햇빛으로도 광합성을 해낼 수 있는 음수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정말 대견하다. 그게 지혜라면 나에게도 좀 나누어 주세요. 갈참나무 씨. 

하늘 한번 참 드라마틱하다. 흐린데도 가시거리는 길어 그처럼 산의 윤곽이 보인다.

오른쪽 멀리로 보이는 문산 쪽 높은 아파트 대가리

저거, 볼 때마다 저거 안 보여야 풍경이 되는 건데 하는 생각. 옥에 티다.

막걸리도 없는 덕진산성에 오르면

날 기다리던 팽나무 아래 서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만을 감상하면 될 것인데

어찌 이런 쓸데없는 일과,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나.

적어내려오다 보니 참 허접할세.

덕진산성은 아직도 발굴 중이다. 삼국시대 토성부터 조선시대 석성까지 계속 수선을 해온 터라 축성술의 발전단계를 보여준다는 전문가의 설명이다. 안쪽 우물 부분은 원래 조사하다가 덮어놓았는데, 최근 앞쪽 올라가는 부분도 파기 시작했다. 포클레인으로 판 곳을 보니, 정말 아래로 돌이 많다. 누가 봐도 원래 돌이 많은 땅이 아니라 돌을 쌓았던 흔적이다. 이런 걸 조사해 과거를 알 수 있다니, 대단하다. 하긴 dendrochronology도 있지 않나. 나이테를 살펴 그 시대를 추정하고, 당시 기후 변화와 환경을 알고, 예술품의 진품도 가린다니까. 덕진산성에서는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아무 것도 팔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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