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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Apr 10. 2018

밤을 사는 사람

<100일 글쓰기 83/100>


김동식 작가님의 <회색 인간> 시리즈 중 좀비 바이러스로 인해 인구의 절반은 낮에만 인간이 되고, 나머지 절반은 밤에만 인간이 되는 이야기가 있다. 새삼 내가 밤에만 인간으로 지내고, 여명이 밝아올 때는 곧 좀비가 될 스스로를 어딘가에 가둬둬야 한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극단적인 설정이 아니더라도 밤에 깨어있고, 낮에 자는 생활을 한다면.

기본적으로 체력이 좋지 않으니 밤에 맞춰 규칙적인 생활을 하다 보면 낮과 그리 다를 것 없이 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해가 질 무렵 잠에서 깨어나려 노력하고 간신히 일어나 몸뚱이를 다독여 씻고 전철을 탈 것이다. 조명이 켜진 대교를 보며 한강 철교를 건널 테고, 그늘보다 짙은 어둠이 온통 깔린 쌀쌀한 밤거리를 바쁘게 걷지 않을까. 코를 훌쩍거리면서. 일을 하다가도 공기가 맑아 달과 별이 선명한 날이면 '아, 반차 쓰고 어디 놀러나 갈까'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퇴근 후에는 아직 날이 어두운 것에 감사해하며 집으로 돌아가 늦은 끼니를 해치우고 예능이나 드라마를 한 편 보고 잘 것이다. 야근—이때에도 '야근'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다—을 하게 된 날이면 순대국밥이나 모닝 맥을 먹고 뻑뻑한 눈에 인공눈물을 잔뜩 들이부어가며 일을 하다가 비척비척 집에 돌아가 세수하고 발만 닦고 쓰러져 잘 것만 같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이 낮 생활에 최적화된 생체 리듬이 아주 공평하게 밤에도 잘 작동하리라는 전제 하에 말이다. '밤의 사람'이 되어도 어려울 것은 없다. 아쉬운 점들이 있을 것이고, 때론 그게 나쁘게 느껴질 것이라는 점 외에는.

좀비가 될 거라는 두려운 설정을 빼고, 몸에 맞는 정도의 깨어있는 시간을 어떻게 초과하여 운용할 것인가로 생각을 하면 많은 게 달라진다. 아침에 일어날 것을 새벽에 불쑥 눈이 떠져 하루를 시작한다거나, 밤 열두 시가 넘으면 잘 준비를 해야 하는데 자지 않고 버티고 버텨 결국 해 뜨는 걸 보고 만다거나. 며칠 전 여행에서 이야기 나누는 게 너무 즐거워서 꽤 취한 상태로 느지막한 시간까지 깨어있었다. 술기운에 기대어 있기에는 지나치게 피곤한 상태였다. 덕분에 다음날 새벽에도 몇 번이나 잠에서 깨어나고 아예 기상한 후에도 병든 닭처럼 굴지 않으려 꽤 노력했다.

평소에 갑작스럽게 파고든 일이 있어서 잘 시간을 부득불 미루고 미룰 때도 마찬가지다. 수명을 대출받아 쓰는 느낌이랄까. 좋아서 하는 일이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더라도 시야가 가물가물해지고 입속이 마른다.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않고 집중하니 나중에는 물보다는 차라리 쌉쌀한 담배 냄새가 그리울 지경이 된다. 밖이 파랗게 밝아오기 시작하면 무턱대고 밖으로 나가 그 서늘한 새벽 공기를 폐 곳곳에 밀어 넣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반대로 급작스럽게 일찍 깰 때도 상태는 비슷하다. 느른하게 늘어져 작게 음악을 켜고, 컨디션을 체크한 후 빈 속에 맥주 마시면 뇌가 쪼그라들 것 같은데 하고 고민한다. 마셔도 큰일이고 마시지 않아도 그날의 멀쩡한 상태라는 것은 오래 지속되질 못 한다. 여러모로 엉망이다. 그런 경험이 쌓이고 쌓이니 스스로 규정하고 있는 것보다 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명으로 대출받아다 쓰는 생활은 맞지 않는.

그래도 아침 댓바람부터 빈 속에 맥주 한 병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새벽까지 안 자고 달구경에 음악 감상이나 잔뜩 하고 싶다는 욕구는 여전하다. 어째서 욕구와 체력이 함께 갈 수 없는 걸까. 지금 아무 생각을 아무 말로 옮기고 있는 것은 급하게 감기가 아직 주춤거리고 있는 탓일 거다. 아아- 타이레놀, 타이레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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