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43/100
지방소도시 출신의 (아마도)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집안 내력이 담이 작은 월급쟁이라서 그런지 우리 부모님이 재산을 불리는 방법이라고는 꼬박꼬박 월급의 일부를 저축하고 만기일에 나올 이자를 받아 개미 눈꼽만큼씩 키우는 거였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이런 건 귀가 팔랑거려 혹시나 하고 들어갔다 쫄딱 말아먹은 것도 수차례다. 맞벌이라지만 받는 월급은 정해져있고, 토끼같은 딸자식들도 있고 하니 자연히 우리집의 주 지출처는 식(食)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때 사회 시간에 '엥겔지수'라는 개념을 배운 후로 나는 매주 옆 큰 도시에 새로 생긴 대형마트로 식료품 쇼핑을 다녀올 때마다 '우리집은 엥겔지수가 진짜 높은 거 같아요' 하고 하나마나한 소리를 했다.
타고나길 소화기가 좋지 않은 탓에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는 구토도 잦았고 입도 짧았다. 한창 먹은 게 고스란히 키로 갈 법한 시절에는 치료 목적의 교정을 하느라 마취하고 생니를 뽑고 비틀어 철사를 박고 당기고 하느라 또 먹는 게 시원찮았다. 엄마는 그런 내가 뭘 먹고 싶다고 하면 웬만한 건 다 해주고, 사주고 싶어하셨다. 막내는 막내 나름대로의 피치못할 서러운 감정이 좀씩 있어서 '왜 언니가 먹고 싶은 것만 사줘?' 하고 울곤 했다. 또 대충은 안 먹는 두 딸래미들의 입맛과 나이가 들수록 심해지는 식탐을 따라가느라 우리집은 매주 가랑이가 아팠다.
sis와 둘이 살기 시작한 후로도 우리는 끼니만큼은 잘 챙겼다. sis가 시장에서 감자와 차돌박이를 조금 사와 진한 된장찌개를 끓일 때도 있고, 다시마로 일본식 간장 육수를 내서 스키야키를 해먹거나 찜기에 찐 차완무시를 해먹을 때도 있고, 강판에 마를 갈아 토로로메시를 해서 도시락 반찬으로 싸갈 때도 있었다. sis가 자주 찾는 농수산물 생산자 직거래 카페에선 제철인 홍새우를 키로 단위로 주문해 회로 먹거나, 흰다리새우를 주문해 감바스 알 아히요, 까수엘라, 간장새우, 양념새우 등을 질리도록 해먹었다. 차도 없는데 둘이 입맛이 좀 달라 코스트코에 가면 나는 거대한 생연어 필렛을, sis는 소고기를 한아름 사들고 와서 각자 연어 그라브락스와 스테이크용 밑간을 해서 냉장고에 차곡차곡 재워뒀다. 멜론이나 파인애플을 선물 받으면 같이 곁들일 프로슈토햄을 또 사서 꼭 곁들인다. 저녁 먹은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입이 출출해서 야식을 먹어도 라면 각 1봉씩 하고 맥주까지 땄다. 캡슐커피 머신을 산 후로는 주말 오전의 기분이 사뭇 달라졌고, sis는 소형 휘핑기에 쉐이커, 바닐라시럽까지 사서 차고 따뜻한 바닐라라떼를 주문대로 만들어줬다.
섬 생활 때 스스로 늘린 맥주량과 애인의 반주 취향이 맞물리면서 외식에 지출하는 스케일도 커졌다. 맥주 한 두 잔씩, 혹은 하우스 와인 한 잔씩 마시면 그대로 각자의 메인 디쉬값이 되어버린다. 결과적으로는 한 끼에 거의 2인분씩 먹어치우는 느낌인 거다.
부모님의 지출이야 가족들 입히고 교육시키고 먹이고 하는 데에 분산하다보면 비율이 지금의 나만치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카드 이용 내역서를 열어보고 싶은데 이것 또한 좀 무서워서 어림짐작만 한다. 아, 나의 엥겔지수... 하고. 왜냐면 두 시간 전까지도 외식하러 가서 몸과 마음의 허기를 모두 까득 채우고 왔기 때문에.
애인이 갑자기 살이 조금 붙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어떤 악의나 목적 없이 정말로 현상에 대한 표현으로.) 먹은만큼 움직이는 걸 그만둔지 오래됐으니 당연한 얘기다. 조금 덜 먹고, 더 움직이고, 엥겔지수도 낮추고 싶다. 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