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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Mar 05. 2018

하루

<100일 글쓰기> 47/100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자기 전에는 애인과 '내가 서울에서 너를 기다리는데도 그건 아무런 위안이 안되는구나' 와 같은 메시지로 설전을 벌였다. 어느 순간 읽음 표시가 사라지지 않았지만 혹여나 내가 타이밍을 놓쳐 더 꼬이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오래도록 핸드폰을 들고 기다렸다. 자야지, 자야지, 자야 일어나서 출근하고 일하지 하는 마음으로 일부러 눈을 붙여봐도 잠은 오지 않았다. 머리가 아팠고, 추웠고, 더웠다. 열이 심하게 났다 식고 또 오르기를 반복했다. 시간마다 비척비척 일어나 화장실에 갔고 잠옷을 벗었다 입었다를 반복했다. 어지럽고 속이 좋지 않았다.

잠시 잠에 든 것 같으면 회사 꿈을 꿨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꿈은 팀장님이 왜 일을 이렇게들 하고 있는지 답답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내게 한참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진짜로 오늘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 다시 눈을 조금 붙였다. 알람이 울리는데도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며칠 전부터 약하게나마 몸살 기운이 있었고 장시간 체온 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다 잠까지 설쳤으니 어쩔 수 없었다. 데드라인이 코 앞인 일이 있었지만 도저히 한 시간 반을 걸려 회사까지 갈 기운이 없었다. 가다가 쓰러질 수는 없어서 급하게 휴가를 냈다.

오전 내내 또 비슷한 꿈을 꿨다. 온열 장판은 새벽에 꺼뒀는데도 등이나 무릎 뒤 같은 곳이 땀 범벅이었다. 뜨거운 물에 적신 솜처럼 몸이 늘어졌지만 더이상은 지체할 수 없어서 겨우 일어났다. 비슷한 컨디션일 때 밥을 챙겨먹지 않았다가 졸도할 뻔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햇반 하나를 데워 엄마가 챙겨주신 볶음김치와 반 그릇 입에 밀어넣고 진통제를 먹었다. 입안은 내내 텁텁한데도 시큼한 볶음김치의 향은 선명해서 다시금 서러워졌다. 확실히 몸이 감정을 타면 아플 수밖에 없다.

느릿하게 샤워를 하고 옷을 챙겨입었다. 다른 직군과 파트가 나뉘면서 휴가를 내도 휴가 공유 메일이 그들에게 가지 않는다. 나갈 채비를 하는 동안 여럿에게 업무 관련 연락을 받았다. 적당히 대답을 하고 장비를 챙겨 가장 가까운 스타벅스까지 걸었다. 하늘이 맑았다. 볕은 따사로웠으나 공기가 시렸다. 지나가는 뭇 사람들은 날이 많이 풀렸다고 좋아했다. 나는 내가 가진 옷 중 가장 두꺼운 거위털 패딩의 지퍼를 목끝까지 잠궜다. 관절 사이사이로 한기가 들었다.

휴가를 내고도 일한다-는 감각이 아니라, 휴가라도 냈으니 회사까지 안 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회사 외부 네트워크에 접속해서 평소처럼 일을 했다. 안 좋은 컨디션에 끌려다닐 여유가 없었다. 이번만큼은 적당히 나를 갉아먹을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왜 아픈데 일을 하냐는 물음에도 오전에 쉬니 좀 나아졌다, 라고밖에 대답할 길이 없었다. 당장 죽을 것 같은 상태는 아니었으니 괜찮았다.

한창 일을 하다 볼일이 급하면 맞은 편에 앉아 마찬가지로 랩톱을 펼쳐놓고 일하는 사람의 눈치를 보다 얼른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느낌으로 몇 차례 화장실에 다녀왔다. 유리창 밖 하늘의 명도가 까무룩하게 낮아졌다. 애인은 집에 들어갔다고 '7시 넘었으니까 너도 퇴근해.' 라며 어깨를 토닥이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집에 돌아올 때는 걸을 자신이 없어서 집 앞에 내려주는 버스를 탔다.

적당히 몸을 갉아먹은 결과로는 업무에 대한 마음의 짐을 조금 덜었다는 것과 정말로 몸살이 제대로 왔다는 것이다. 반 남겨뒀던 찬밥을 뜨거운 녹찻물에 말고 볶음김치를 곁들여 저녁으로 먹었다. 감기용 타이레놀을 한 알 먹었고, 쌍화탕도 한 병 데워 마셨다. 자고 일어나면 또 괜찮을 것이다. 잘 자고 일어나면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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