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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Feb 25. 2018

이불

<100일 글쓰기> 39/100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덮던 담요가 있다. 외할머니가 시장에서 사오셨다는 담요는 아주 진한 복숭아색에 노란색 수달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을만큼 어릴 때는 그 담요가 없으면 잠을 못 잤다고 한다. 나는 금세 담요 밖으로 팔다리가 비죽 삐져나갈만큼 자랐고, 초등학교 때까지는 부모님 차에 싣고 다니면서 늦은 밤 귀가길에 덮고 자곤 했다. 몇 번 이사를 다니며 없어졌구나 했는데 작년에 부모님 집에 가니 담요가 나왔다. 너무 많이 빨아서 이제는 얇아졌다는 엄마의 옆에서 그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웃었던 게 기억난다.


  엄마는 이불 쇼핑을 자주 하신다. 이미 집 떠난 딸들 덮을 이불까지 챙겨주시느라 그렇고, 큰집도 아닌데 큰집처럼 매번 외가식구들이 오고 가는 걸 고려해서 여분을 많이 준비해두느라 그렇다. 나는 열대야가 괴롭히는 날만 빼면 거의 1년 내내 이불을 무겁게 덮고 자야하는데, 그래서 엄마는 계절마다 이불을 챙기느라 더 바쁘다.

  가장 좋아하는 조합은 오리털 이불에 극세사 차렵이불을 겹쳐 덮는 것이다. 한겨울에는 온기가 쉽게 새어나가지 않아 오래도록 따듯하고, 간절기에는 오리털 이불의 첫 느낌이 시원해서이다. 여름에는 자다가 너무 더우면 극세사 이불은 멀리 뻥 차고 오리털 이불은 반은 몸에 덮고 반은 다리 사이에 끼고 잔다.

  지난 여름 새로운 거처로 옮겨온 뒤로 오랜만에 입식 생활을 시작했다. 침대를 하나 샀고, 그에 맞춰 전에 없던 이불커버를 내 취향대로 장만했다. 호텔식 침구라는 300수짜리 새틴면으로 된 하얀 커버다. 오리털 이불에 입히면 온통 사그락거리고 시원하다. 매트리스 커버도 300수짜리 플랫시트를 구매해서 꼈다. 밴딩이 없어 사방팔방 각 맞춰 접고 매트리스 밑에 끄트머리를 밀어 넣어야 한다. 그럼에도 무늬 없이 하얀 것이 퍽 마음에 들어서 만족스럽다.

  문제는 극한의 추위가 스미는 계절이 되니 이 사그락거리는 감촉 때문에 자꾸 몸이 식는 것이다. 면 재질에는 도가 터있는 엄마가 처음 보자마자 걱정하셨던 그대로다. 결국 매트리스 커버 위로 온열장판을 올리려니 깔개가 필요해졌다. 깔개까지 장만할 정신은 없었던 터라 결국 엄마가 준비해주신 에메랄드색 극세사 패드가 놓이고, 나는 한결 따뜻하게 잠을 청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이 계절이 끝나갈 무렵까지도 엄마표 패드 몇 개가 번갈아가며 내 몸을 덥혀줬다.

  섬에 살 때 집에 방문한 누군가가 내게 아직도 엄마가 이불을 챙겨주시냐 놀렸던 것이 생각난다. 그땐 좀 부끄러웠는데, 그래도 엄마가 안 챙겨주셨으면 난 정말 얼어 죽었을 거다. 이번 주에도 놀러오셨던 엄마가 며칠 뒤 방문할 친척들이 쓸 이부자리를 꺼내 거실 한켠에 준비해주고 가셨다. 엄마가 이불 부자라 참 좋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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