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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Mar 12. 2018

시절이 밀려와

<100일 글쓰기> 54/100


언젠가 쓸 것 같아, 라는 생각에서 이것 저것 모으던 시절이 있었다. 집에서든 회사에서든. 집은 몇 차례 이사를 하면서 꽤 많이 솎아낸 편이다.

회사의 경우 스탠딩 데스크 상판을 치운 후로는 이것저것 늘어져있는 게 보기 싫어서 줄곧 정리를 해왔다. 그 중에 가장 보기 싫은 것은 온갖 케이블이다. 랩톱 충전기, 아이폰 충전기, 안드로이드폰 충전기, 랩톱과 모니터를 연결하는 케이블, USB 연결을 위한 허브 케이블, 가습기 충전기, 게다가 주로 내 자리에 비치해두는 다른 랩톱과 마우스 케이블까지 하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선 자체가 주는 복잡하고 어지러운 느낌 외에도 사이사이 가라앉아 선을 옮길 때마다 풀풀 날리는 먼지 때문에 목이 깔깔해지곤 한다.

이러한 선들은 안 쓸 때는 죄다 서랍의 케이블 박스에 넣고, 긴 선은 기 감독님께 배웠던대로 둥글게 말아서 흐트러지지 않도록 빵끈으로 한쪽을 묶는다. 항상 책상 위 고정 위치에 있어야 하는 선은 모니터 후면 지지대에 마찬가지로 둥글게 말아두었다. 키보드도 무선, 마우스도 무선.

이렇게 하고 나면 남는 건 각각의 작은 악세사리들이다. 주요 장비 외에 책상에 상시 나와 있는 것으로는 랩톱 거치대, 핸드폰 거치대, 연필꽂이, 가습기, 마우스 패드, 곽 티슈가 있다. 개중에 제일 덜 쓰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면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은근 메모를 할 때는 바로 꺼내 써야하는데다, 내 연필꽂이의 가위와 커터칼은 거의 공용 물품에 가깝다. 결국 치울 수 없으니 늘어지지 않게 모니터 주위로 모으되 동선은 간결하고 걸치적거리지 않도록 적당히 배치를 해두었다.


서랍은 세 칸, 제일 위칸은 몇 개월째 방치 중인 영양제들과 자주 사용하지 않는 문구용품, 명함, 아이스 모드로 들어설 때 꺼내 쓸 콜드컵 정도다. 둘째 칸에는 케이블과 일주일에 두 세 번 꺼내쓰는 장비들을 넣어두었고, 세 번째 칸에는 새 것에 가까운 노트들과 견과류, 간식거리가 조금 들어있다.

아침에 오랜만에 견과류를 꺼내려고 세 번째 칸을 열었다. 메모를 위해 쓰던 이면지를 거의 소진한 상태라 간만에 노트를 이어서 써볼까, 하고 뭉치를 들었더니 사이사이 오래된 흔적들이 비져나왔다. 팀에서 거의 2년 전에 제작한 스티커라든가 예뻐서 사놓고 쓰지 않은 캐릭터 스티커, 첫 행사 때 찍은 단체 사진을 인화해둔 여분 몇 장, 행사 때 쓴 엽서 같은 게 나왔다. 조금 더 필요한 사람이 있겠지 싶어 스티커나 엽서는 새로운 주인을 찾아주었고, 색이 변색된 OPP 봉투는 쓸 일이 없을 것 같아 버렸다.


그 외에 또 발견한 것은 스물셋, 넷쯤 되었을 때 찍은 'the sand'의 실내 사진이다. 볕이 따뜻한 어느 평일 오후에 손님이라곤 혼자였던 시간에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었다. 당시 읽으려고 가져갔던 책은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의 작가였던 김성원 작가가 쓴 '그녀가 말했다' 였다. 사진 세 장을 섬에서 근무할 때 자리에 붙여뒀던 것이 생각났다. 자리를 정리하고 마음을 정리한다는 핑계로 떼어내 서랍에 넣고 잊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아릿하게 그 시절이 밀려왔다. 나의 생활이 라천과 임경선씨, 하루키와 에쿠니 가오리로 가득했던, 고민도 많고 눈물도 많고 감정이 지나치게 넘쳐 흘렀던 그 때가.

출근길에 읽은 글은 업무를 정리하려면 오피스 자리 정리를 먼저 하랬는데 어쩐지 오늘의 자리 정리는 마음을 산란하게 만들뿐이어서, 문득 조금 외로워졌다. 많은 게 다시금 스며든다. 라천의 시그널 음악이었던 Groove Armada의 At The River 를 듣다가 자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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