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61/100>
올해 들어 가장 인상 깊었던 평가는 '갑자기 단단해진 것 같아' 라는 말이었다. 애인은 별로 신경쓰지 말라고 했지만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덜 동요하고, 조금 더 순발력있게 대응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기뻐했던 게 사실이다. 적어도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만큼은 말이다.
잘 망가지고 금방 회복한다. 그만큼 일희일비하는 타입이란 뜻이다. 요즘의 내가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뇌하고 있지만 애인은 '넌 누가 니가 하는 일이 가치 있다고 인정해주면 또 금방 신나서 일할 거야' 라고 했다. 평소처럼 아니야, 라고 응수하고 싶은데 곰곰이 생각해봐도 수긍이 되는터라 발만 동동 구르고 말았다.
그래도 하산시켜야겠단 소리를 몇 해째 듣고 있을 정도면 스스로도 동기부여 방법도 찾아내고 잘 적응하든 상황을 타개하든 해야하지 않겠나 싶은데 어째 쉽지가 않다. 부정적인 감정의 역치가 낮아졌고, 뭔가 잘 풀리지 않아 한숨을 포옥 내쉬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일이 늘었다. 어쩐지 울적한 소식만 들리니 점점 더 쳐지기만 한다. 이제는 어디 가서 소리를 와아악 지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일자로 곱게 누워 눈을 감고 음악만 듣고 싶어진다.
이럴 때는 하얀 종이에 생각나는 걸 하나씩 적어본다. 어디부터 꼬인 걸까 연결되는 키워드들을 얼기설기 적고, 비슷한 것들을 묶고 계층 구조를 만든다. 사이사이 공백을 마저 메우고 난 후에는 일단 스스로 상황에 대한 이해를 어느 정도는 했다는 안도감을 갖게 된다. 문제 상황은 알았으니, 그 다음은 해결책이다. 어떤 선택지가 있을까 생각하고 각각의 장단점, 필요한 작업이 무엇인지 적는다.
귀 청소를 하고 손톱과 발톱을 깎는다. 공들여 꼼꼼하게 양치를 하고, 치실을 해서 스트레스 때문에 염증이 나 부은 잇몸을 터트린다. 그야말로 터트린다, 의 느낌이다. 툭 터져서 빨간 핏물을 뱉고 나면 금세 나아지니까. 그리고 따뜻한 물로 오래도록 샤워를 한다. 평소보다 2배 정도 길게. 손톱과 발톱 뿌리 부근에 퉁퉁 불어 말랑거리는 큐티클을 긁어내고 귓등도 공들여 닦는다.
샤워를 한 후에는 집 청소다. 되는대로 창문을 다 열어젖힌 뒤 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리고 먼지가 앉을만한 곳은 모두 물티슈로 닦아낸다. 닦으면서 눈에 보이는 어지러운 물건은 모두 치우거나 한데 모아 정리한다. 그리고 잔잔한 음악을 틀고 따뜻한 허브티를 한 잔 우려 마신다. 그 후엔 한 차례 정제된 생각을 바탕으로 움직여 나가면 된다.
지금의 가장 어려움은 그 일련의 과정을 수행할 에너지가 전혀 없다는 부분이다. 망가진 건 알겠는데 이걸 어디부터 어떻게 수선하면 될지 감이 오지 않는다. 고민을 하다보면 나는 왜 이깟 고민에 발 묶여 있을까 하는 자괴감에 빠져든다. 벽에 부닥친 것 같다. 더이상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수험생 시절 비슷한 상태에 빠졌을 때는 종교를 가지면 나아질까, 하는 고민도 했던 것 같다. 지금은 어떤 게 내게 위로나 실마리가 될 지 모르겠다. 다 컸다고 믿고 싶은데 아직도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