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을 못하는데 웃으며 하는 사람
권태와 무료
다음은 근육통
내가 몸에 대해서 신경 쓰기 시작한 건 첫 직장을 마무리할 때쯤이었다. 첫 직장은 ‘권태와 무료’라는 단어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처음 일 년간은 내가 잘 몰라서라는 말로 스스로를 속였지만 2년 차가 되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직장은 내 생산성에 관심 없었고, 나는 무기력에 절어 있었다. 퇴사를 선포 한 뒤 처음 맞이하는 일은 운동이었다. 처음엔 무작정 걷기로 시작했고 이후에는 스피닝, 검도를 거쳐 크로스핏으로 이어졌다. 내가 몸을 쓸 줄 알았다면, 그렇게 헤매진 않았을 텐데 뭘 해도 뜨뜻미지근했다. 마지막 선택이었던 크로스핏은 몸치와 박치를 골고루 갖춘 나조차 몸져눕게 만드는 무서운 운동이었다. 짜릿한 근육통을 선사받고 숨만 쉬어도 아프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덕분에 나는 통증으로 몸 구석구석을 감각했다. ‘권태와 무료’는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나에게는 분명 에너지가 있었는데 어디 하나 쏟아낼 수 있는 창구가 없었던 것이라고. 때마침 만난 근육통이 통쾌할 정도였다. 당시에 난 자학인지, 즐거움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운동에 의존했다.
실패가 기본인 영역 = 운동
대차게 넘어진 후에도 웃을 수 있는, 이미 포기해서 기대 없이 반복할 수 있는 영역. 완벽주의를 버리고 타인이 침범해도 푸시시 웃어버릴 수 있는 영역. 어차피 잘 못해서 민폐를 끼친다면 기꺼이 웃음거리가 되기로 했다. 나는 못하는 것을 웃기게 할 수 있다. 웃기는 사람이 되어 나의 못남을 조금 즐겨주기로 했다. 속 없이 웃는 걔. 그건 못난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못난 모습을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인생에 공통점이라고는 없을 듯 한 사람들과 뇌를 놓고 아무 말을 하더라도 자기 비하의 영역은 딱 운동 능력에 대한 것까지. 불편한 대화를 대충 웃으며 넘기는 법을 조금은 익혔다. 새로움을 고난, 불행과 짝을 지어 연결했던 뻣뻣한 사고방식을 스트레칭시켰다. 땀을 흘리고 나면 아무것도 못하고 뻗어 버릴 거니까, 불행이고 실패고 불안이고 나발이고 다 생각이 안 난다.. 순간순간 동작에 집중하고 나면 움직임의 성과는 고스란히 다음 날의 근육통이 되어 찾아왔다. 근육통 자체는 쓰지만 변화의 감각이라고 생각하면 달기만 했다.
나의 운동을 지속하게 한 건 몸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막막한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운동을 했다. 그저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잘 씻기면 미래의 시간이 오니까. 다행스럽게도 아주 형편없는 동작을 반복해도 체력과 근육은 성장했다. 그 체력으로 현실을 몸빵으로 해쳐나가며 미래를 도모했다. 땅바닥을 보며 걷듯, 나는 운동으로 한 치 앞만 보았다. “낼 운동가야 하니까. 그 약속 못 가. 집에 가서 운동복 빨아야 해. 씻고 자야 해. 무리하면 안 돼.” 여전히 앞 길 구만리... 못 본 척, 모르는 것으로 두었다. 그렇게 재능도 기대도 없이 엉망으로 따라한 동작으로도 근육통이 생겼고 영 못 써먹을 줄 알았던 내 몸뚱이도 서서히 그럴싸한 동작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아주 기뻤다.
웃긴 점이 있다면 번지르르한 깨달음과 달리 나의 운동 능력은 모래성처럼 쌓이다 무너지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활에 여유가 사라지면 운동은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다시 시작하는 일은 지겹고 답답하지만, 그게 너무 슬프거나 무섭지는 않다. 잘할 욕심 없이도 꾸준히 할 수 있고 꼭 잘하지 않아도 배워 볼 만한 일이 많다는 걸 실패가 기본인 영역을 통해서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일단은 내 몸을 존중하며 하루 8시간의 수면과 두 끼의 식사와 주 3회 운동을 지켜줘야 한다고 되뇐다. 세상 누구보다 나를 신경 쓰는 건 나니까. 이건 아주 분명한 행복의 공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