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을 권유받은 후 3주간...
단식을 해보는 게 어때요?
요가를 하다 손목이 아파서 물어보니 아무래도 체중 때문일 거라고 단식을 권유받았다. 손목은 아프고 요가는 계속하고 싶다. 아픈 손목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 단식이라는 조언에 이후에 머리가 좀 멍하다. 의문이다. 의문이 맞나? 일단 내가 단식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단식에 성공한다면 좋은 일이지. 그런데 단식을 성공하고 살이 빠진다면…? 다음이 갑자기 두려웠다. 감량한 내 모습이 너무 맘에 들어서 거식증에 걸려버릴지도 모를 상상. 마름이 주는 느낌이 곧 승리했다는 감각으로 느껴져서 책 속에서 봤던 감정들을 차례대로 겪어나가는 건 아닐까 생각들이 연쇄적으로 충돌했다.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지만, 생각을 멈출 수 있으면 그게 생각일까?
단식에서 거식증까지는
생각하는 건 좀... 오버지?
얼마 전에 읽었던 책들이 떠올랐다. <욕구들> 그리고 <마른 여자들>은 극단적인 마름에 대한 책이었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미약한 두통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생각한 문제들은 아니지만 언제나 가까운 문제들이고 나의 주변인들이 격렬하게 외모 그리고 체중과 싸워나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솔직한 말로 나 역시 포함되는 이야기였다. 단지 내가 들춰보지 않았을 뿐 얇은 가리개에 덮인 ‘그런 문제들’은 내 주변 널려있었다. 몸. 몸. 몸.
내 나이 서른마흔다섯. 성장판은 닫혔지만 증량의 가능성은 닫히지 않았다. 아주 싫어하던 운동을 이제 좋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체중은 잠재력에 부응하는 듯 해마다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몸무게를 줄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지만 진검승부를 본 적은 없다. 조급한 마음이 들어도 운동량을 평소보다 늘리고 넉넉한 허용범위 내에서 식단을 가다듬는 방식으로, 허락, 허용, 인정이라는 단어로 살뜰히 몸을 키워왔다. 작아진 옷들이 아쉽기도 했지만 새로 산 넉넉한 옷들도 좋았기에. 그런데 단식이라니.. 요가원에서 단식에 대한 이야기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묘한 두려움이 겹친다.
먹는 고민
식사에 대한 생각은 사실 계속해서 하고 있다. 매일 뭔가를 먹는 일은 계속해왔는데 우리는 왜 먹는 일에 베테랑이 아닐까? 이 정도 연차까지 왔으면 요령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먹고사는 일은 너무 많은 요령이 필요하다. 엄마밥과 급식을 지나 회사에서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까지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나의 식사를 온전히 나의 재량으로 꾸리는 지금은 지겹다. 지겨워. 돌아서면 밥 생각을 하는 건 같은데 과거에는 온전히 예능이었던 식사가 이제는 시사, 교양, 다큐를 넘나들고 있다. 사건사고와 정치와 상식이 부딪히는 장소가 되었다. 무엇을 어떻게 먹을지 생각하는 일이 갑갑하게 느껴지곤 한다. 때마다 식사를 넣어줘야 하는 유기체로 살아가는 일은 피곤한 일이다. 하루 종일 먹는 생각하는 게 즐거운 일이 아니라 고역이 될 줄이야 몰랐다. 물론 여전히 아무 생각 없이 음식은 휴식이고 즐거움이고 행복이기도 하다
참는 일 말고 새로운 일
단식이 내 손목의 통증을 없애는 해법이 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단식이라는 단어 앞에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뛰어들어서 이겨내는 짓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 두려움을 의지로 이겨내는 방식은 너무 지친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다. 하지 말라고 하는 건 사실 의미가 없다. ‘안 한다’가 아니라 집중할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변화의 가능성이 커졌다는 걸 기억하고 있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오이. 나는 오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 오래되고 새로운 존재를 다시 만나게 된 건 동년배 친구에게 ‘안주’라는 새 역할로 소개받은 이후부터다. 아삭하게 씹히는 오이의 청량함을 몰라봐서 미안하다. 오이를 생각하니 두려움은 줄어들고 기분은 상쾌하다. 그래. 일단 단식 말고 오이하기로 하자. 단식이라는 공백을 대신해서 백오이와 청오이의 맛을 음미하고 구별하는 노력을 해본다. 절대 싫다고 했던 당근과 파프리카도 종종 식탁의 한편에 올리는 어른이 되어본다. 다행이다. 친구가 오이를 새로 소개해줘서.
단식에서 오이까지
글 친구들에게 손목 통증으로 단식 권유를 받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식에서 오이까지 생각이 넘어오는 데 걸린 시간은 3주. 속 시끄러운 투정을 그냥 넘기지 않고 받아 주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고민하는 과정이 내내 외로웠다면 나는 오이도 손목도 잃었을 거다.
무엇보다 잘 먹기 위한 고단함을 헤아려줘서 좋았다. 점심 식사 먹고 돌아서면 찾아오는 저녁 식사의 지겨움을 공감해주면서도 먹는 게 지겨운 건 어쩌면 먹는 일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일 거라는 말에 수긍했다. 그래. 맞다. 먹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고통인듯하다.
단식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친구는 먹는 일에 시행착오는 계속될 거라며 여러 시도를 해보라는 말에 수긍했다. 좁히고 당기고 풀어지기도 하면서 적당함을 익힐 수 있을 거라고. 그래. 맞다. 나는 계속해서 먹는 존재일 테니까.
잡식성 동물로 플라스틱을 만들어내는 종족으로 지구에 사는 주제에 무해하고 싶다는 것도 욕망이라는 말에도 수긍했다. 그래. 맞다. 유해함을 인정하자. 그건 좀 버텨야 할 문제다. 털어버릴 수 없으니까. 여러 제약 속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누리고 싶으니까. 결국 할 수 있는 건 가능한 선까지만, 너무 고민하지 말 것.
너무 쉽게 단식을 꺼낸 것 아니냐며 의아함을 표현한 친구는 득달같이 손목 통증에 도움이 될 링크를 가져왔다. 링크를 따라가서 살피고 사력을 다해서 손가락과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기세를 가지고 손바닥과 땅바닥을 붙이고 기도하듯 바닥을 밀어내었다. 기도가 먹혔나 보다. 놀랍게도 통증은 줄어들었다. 다행이다.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해서. 혼자서 끙끙 앓지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