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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윤 Nov 12. 2017

품위 있는 그녀 박복자는 레즈일까?

안녕하세요 대한민국에 사는 30대 레즈비언 파랑입니다.


오늘은 8월 19일에 끝난 드라마 '품위 있는 그녀’에 대해서 얘기해보려고요.

이 드라마는 시작 전부터 김선아 x김희선, 두 배우의 워맨스가 기대된다는 기사들이 많이 보도가 되었어요.

김선아, 김희선의 워맨스라니! 저도 기사를 보고 나니까 두 배우가 어떤 캐미를 보여줄지 너무 궁금했어요.

하지만 드라마 스토리를 읽은 뒤엔 두 여자배우가 주인공인 드라마는 이런 막장 스토리 일수밖에 없을까 더 멋있는 역할은 없었을까?라는 생각에 기대보다는 실망감이 더 컸어요.


드라마 줄거리를 대략 얘기해보자면 이래요.

늙은 재벌 회장이 건강이 나빠지자 젊은 여자 간병인(김선아)을 구해요. 그 간병인은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상류사회에 대한 욕망을 품고 회장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거였고, 그녀의 계획은 성공을 하고 결국 재벌집의 안주인이 돼요. 늙은 회장은 재산을 홀라당 새 부인이 된 간병인에게 넘기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자식들과 돈을 지키기 위한 간병인과의 갈등을 보여주는 드라마라고 말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이런 줄거리를 들으면 완전 뻔한 막장 드라마 같잖아요. 하지만 '품위 있는 그녀'는 막장드라마랑은 좀 달랐어요. 간병인 박복자라는 인물 위주로 생각해본, 드라마 품위 있는 그녀가 뻔한 드라마가 아닌 이유! 세 가지를 얘기해 볼게요.


첫 번째는 드라마의 내용 전개 방식이에요.

드라마는 부잣집 안주인으로 보이는 박복자의 죽음으로 시작해요. 그리고 처음부터 시청자한테 질문을 던져요. '누가 박복자를 죽였을까. 맞춰보세요.'

이런 질문은 탐정만화의 처음과 비슷해요. 탐정만화는 시체가 나타나고 그때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잖아요. 만화에서 주인공은 탐정인 코난이나 김전일이지만,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죽어버린 박복자예요. 그리고 탐정의 역할은 시청자에게 넘어간 거죠. 그래서 마지막까지도 "그래서 누구야? 누가 박복자를 죽였는데?"라는 관심을 놓지 못하게 한 것 같아요.


두 번째는 주인공 박복자라는 캐릭터예요.

이야기 속에서 뻔한 인물들을 보면 착한 역할은 속 터지게 바보 같고 순진하고, 나쁜 역할들은 극단적으로 짜증을 내고 폭력적이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박복자라는 캐릭터는 좀 달랐던 거 같아요.

자기 욕망을 위해서 싸구려 민낯을 드러내는 것에 부끄러움이 없고, 남을 속이고 때리는 것에 죄책감이 없어 보이는 것까지는 막장드라마 속의 완벽한 악역이에요.


하지만 서러웠던 과거 때문에 자기 연민에 빠져서 위태한 모습들을 보다 보면 미운 악역이 아니라 속상하고 안쓰러운 캐릭터 같았어요. 비싼 가방을 끌어안고 우는 모습이나, 750억을 가지고 가는 곳이 해외가 아니라 고작 호텔이고, 욕망에 사로잡힌 어른이 아니라 아이같이 조금은 순진해 보이는 그런 모습들로 인해 박복자라는 가상의 인물에게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고, 연민을 느낄 수 있었어요. 김선아 씨가 너무도 완벽하게 연기했기 때문에 드라마를 계속 보게 되었던 게 아닌가 해요.


세 번째는 우아진을 향한 박복자의 동경이에요.


우아진은 김희선 씨가 맡은 역할로 재벌 회장의 둘째 며느리예요. 미모, 지식, 품위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강남 사모님이에요. 우아진은 강남 사모님들의 대세를 따라가긴 하지만 자신만의 기준이 있고 바른 소리를 할 줄 아는 자존감이 높아 보이는 그런 여자예요.


보통 드라마에서 악역들은 부러운 대상이 있으면, 망가뜨리고 짓밟고 빼앗으려고 하잖아요.

하지만 박복자는 항상 우아진 앞에서 만 온순한 모습을 보였어요. 죽은 박복자의 내레이션에서 다음 생애는 박복자가 아닌 우아진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대사가 나와요. 박복자가 우아진에게 가진 감정은 질투와 시기가 아닌 동경이에요.


마지막 회의 박복자와 우아진의 첫 만남 장면에서 박복자가 우아진에게 첫눈에 반한 장면이 나와요. 저는 그 장면이 가장 좋았어요.

호텔에서 일하고 있던 박복자가 스위트 룸에 있던 우아진에게 세탁물을 가져다주고 나서 세탁물을 받은 우아진이 박복자에게 메모를 남겨요. '그쪽이 맘에 들었다 몇 시까지 아까 그 방으로 와라.'라는 쪽지는 당연히 아니고, "세탁물 고맙다. 항상 행복해라." 뭐 이런 내용의 메모였어요.


보통의 드라마였다면, 메모를 본 박복자는 '뭐야, 너는 뭐가 그렇게 행복해, 돈에 품위까지 다 가졌네 쳇.'이런 독백을 하면서 우아진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네가 가진 거 내가 다 빼앗아 버리겠어'이랬을 것 같아요.


하지만 품위 있는 그녀에서 박복자는 '쏘 스위트. 하트 뿅뿅.' 우아진에게 반해 버려요. 얼마나 반했냐면 우아진이 준 쪽지를 버리지 않고 갖고 있었고, 얼마나 봤는지 우아진의 필체까지도 외워버려요.


드라마 속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상류가 되고 싶은 욕망에 빠진 사람이, 이쁘고 돈 많고 거기다 친절하기까지 한 여자를 봤을 때. 반해버리는 경우가 얼마 나있을까요? 그녀를 질투하고 미워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게 된 거잖아요.

식상하고 재미도 없고 공감도 안되고 극단 적인 캐릭터들이 나오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이야기가 수두룩 했었는데 '여자가 여자를 향한 동경, 여자들의 연대'를 그린 이야기가 나오니 더 관심을 갖게 되고 흥미롭게 볼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박복자의 감정이 '동경'이라는 단어 하나로 충분이 설명이 되지 않는 것 같았어요. 박복자가 레즈비언이었다면 우아진에게 가진 동경은 사랑의 시작이라고 봐도 무난하잖아요. 이성애 중심 사회니까 박복자가 우아진에게 가진 감정이 로맨스가 아니라 동경으로만 표현된 거 아닐까? 싶어요.

이런 호감을 동경과 사랑 딱 두 가지로 나누는 것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무성애에 관심이 생겼고 이런저런 것을 찾아봤어요. 잠깐만 무성애에 대해서 얘기를 해볼게요. 

여러 정보들을 찾아보면서 무성애자는 '좋아하는 감정'에 대해서 엄청난 고민이 있겠구나 하는 걸 보고 한번 놀랬고, 이렇게까지도 분류가 가능하구나 하는 걸 보고 또 한 번 놀랬어요.


무성애는 '끌림이 있다/ 없다' 두 가지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스펙트럼으로 존재하고 그 영역을 세부적으로 분류하고 각각의 정의가 내려져 있었어요.

끌림로맨틱 끌림, 성적 끌림, 관능적 끌림, 미적 끌림, 이렇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저는 로맨틱 끌림과 성적 끌림 이 두 가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저는 레즈비언이니까 호모 로맨틱, 호모 섹슈얼이라고 할 수 있겠죠?


무 로맨틱 스팩트럼 중에서 콰로맨틱/플라토닉 로맨틱 영역이 있는데 무슨 뜻이냐면, 연애감정을 정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경험하는지 알지 못하거나 우정과 연정 사이의 감정을 갖는 유형이라고 해요.


이런 용어는 '나는 타인과 콰로맨틱까지 가능해. 나는 콰로맨틱 지향성'이라고 정체성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박복자가 우아진에게 느꼈던 '동경'이라는 감정을 '콰로맨틱'이라고 표현해 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만약에 드라마에서 박복자의 감정이 좀 더 깊은 로맨틱 감정으로 표현되었다면 충분히 레즈비언이라고 확신했을 거예요. 하지만 무성애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로맨틱 끌림과 성적 끌림이 나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동성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가졌단 이유 만으로 레즈비언이라 단정 짓기는 어렵지 않나 해요.


무성애 자료를 찾아보고 끌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하다가 박복자랑 연결 지어 이야기해봤는데 들을만하셨나요?


무언가를 더 알아 갈수록 사람들은 너무도 다양하고 복잡하니까, 나와 다른 대상을 머리로 분석해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고, 어찌 보면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어요.

하지만 내 이해의 폭이 좁다고 해서 나와 다른 사람을 무조건 적대시하고 배척하는 것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지금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하고요. 구독! 하트! 부탁드려요.

다들 주말 잘 보내시고요. 담주에 봐요. 안녕.


레즈비언 생활 보고서 | 레생보는 팟캐스트와 인스타도 하고 있어요.

팟빵  http://m.podbbang.com/ch/14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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