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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윤 Sep 22. 2017

중학생 때 처음, 난 레즈비언이구나

여자는 왜 치마교복을 입어야 할까

안녕하세요. 대한민국에 사는 30대 레즈비언 파랑입니다.


이번엔 무슨 얘기를 해볼까 하고 일기장을 뒤져봤어요.

제가 99년도에 쓴 일기를 사연 삼아 얘기해볼까 해요. 너무 오글거리는데 한번 읽어볼게요.


99년 8월 29일 일요일. 제목 깨달음.


재방송으로 드라마 퀸을 보았다. 나는 김원희 언니가 연기하는 강승리 역이 참 맘에 든다.

남자에게 지지 않고 당당한 모습,

자기가 잘하는 것을 남들 보다도 잘하는 능력이 있는 모습이 맘에 들었다.

나도 그런 여자가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을 더 잘해야겠다.

앞에 나가서 또박또박 말하는 말솜씨를 키워야겠다.


6학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나는 남자애들이 하는 공놀이를 좋아하고 걔네랑 개구쟁이처럼 놀았다. 몸만 빼고 완전히 남자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만 가지고 뭐라고 했다. 반 애들은 중성이냐고 놀렸다. 그래서 친구에게 남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친구는 "여자도 다 할 수 있는 일이야.

남자에게 지지 말고 너도 하면 돼."라고 대답해 주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남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말고 남자에게 지지 말고 이기자!

지금 우리 사회는 좀 불공평하다.


이런 불공평한 세상에서 여성들이여 파이팅!


99도에는 제가 중1이었는데 사춘기 오기 전인가 봐요. 이렇게 착한 척하면서 일기를 쓴 거 보면.

사춘기 오고 나서 일기는 다 찢겨 없어졌더라고요.

중 1 때의 저는 회사도 다니기 싫어서 뛰쳐나오고 말도 똑 부러지게 못 하는 30대의 저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실망하고 한심해하려나.



저는 어렸을 때부터 커트 머리를 좋아했고, 치마 입는 걸 싫어했어요.

그리고, 공놀이와 비비탄 총, 미니카를 좋아했어요.


스타킹을 신고 치마를 입은 나보다 커트 머리를 하고 헐렁한 옷을 입은 내 모습이 더 좋았어요.


엄마는 그런 제게 항상 "여성스럽게 좀 행동해. 여성스럽게 좀 입어라." 얘기했어요.


치마를 입으면 운동장에 나가서 축구도 못하고, 뛰다가 치마가 펄럭여서 팬티를 보일까 봐 조심조심 걸어야 하는데 왜 나한테 어울리지도 않는 그런 옷을 강요하는지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초등학생 때는 남자가 되고 싶었어요.

남자애들은 치마를 입으라는 잔소리 듣지 않으니까. 뛰어놀고 축구 잘하면 칭찬해 주니까.

그게 너무 부러웠어요.


남자처럼 행동하지 말고 여자처럼 놀아라 라는 말이'니가 원하는 건 남자 꺼야. 너는 가질 수 없어. 남자를 이기려고 하지 말아라.'라는 말로 들렸어요.


근데 그런 저한테 어떤 선생님도, 엄마도 해주지 않았던 말을 친구가 해준 거예요.

'치마 입기 싫으면 안 입어도 되고, 축구하고 싶으면 축구해도 돼. 꼭 남자가 되지 않아도 여자도 다 할 수 있어.'


그 이후로 저는 '남자가 되고 싶다'에서 '왜 여자는 안되지?'로 생각이 바뀌었어요.

'왜 머리가 짧으면 안 되지?' '여자는 왜 축구하면 안 되지?'


여중에 입학하고 나서는 '왜 바지를 입으면 안 되지?'라는 불만이 가장 컸어요.

제가 중·고등학생는 바지 교복이 없어서 무조건 치마를 입어야만 했어요.

교복이 치마니까, 학교 다니려면 입어야만 하니까. 그런 것들이 족쇄 같았어요.


처음에 중학교에 입학하고 치마 교복을 입고 가장 처음, 크게 불편을 느꼈던 게 있어요.

뒷자리 친구랑 얘기를 할 때 등받이가 가슴 쪽에 오게 아예 다리 벌리고 뒤돌아 앉는 자세 있잖아요.

말 타는 자세라고 해야 하나 치마 교복은 그걸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걸 하려면 치마를 팬티가 다 보이도록 허리춤까지 올려야 다리를 벌리고 뒤돌아 앉기가 가능했어요.


엄마한테 말했더니 그렇게 앉지 말래요. 그럼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그 말에 제가 괜히 서운하고 화가 나서 치마가 잘못된 거지 내 행동이 잘못된 거냐고 괜히 엄마한테 화냈던 거 같아요.


학교에서도 치마를 입으면 매일 같이 듣는 잔소리가 있었어요.


치마를 입고 다리 벌리고 앉지 말아라.


어떻게 들으면 당연한 얘기지만 사실 당연한 건 아니에요. 다리 벌리고 앉는 게 편하거든요.

왜 청소년들이 매일매일 불편한 치마를 입어 야만 하고 치마로 인해 불편하게 생활 해야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어요.


그렇게 중학교를 다니면서 사춘기가 오고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인가 처음으로 친구를 보고 떨림을 느꼈어요.

같은 반 아이가 앞머리를 뱅으로 딱 자르고 왔는데 완전 인형 같은 거예요.

저 완전 금사빠. 그냥 그 순간 반했어요.


그 아이에게 가까이 가기만 하면 굴이 빨개지고 가슴은 엄청 뛰고 말도 건네지 못 하눈도 못 마주치고 엄청 바보 같았어요. 당연히 고백해볼 생각도 못 했고요.


같은 반 여자 친구를 좋아하는 나를 깨닫고 나서는 처음엔 내가 잘못되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잘못된 걸 친구나, 가족들이 알게 되면 어쩌지 걱정도 많이 했고요.


그 아이에 대한 마음이 커져 갈수록 난 왜 여자를 좋아할까라는 걱정도 함께 커졌어요. 할 수만 있다면 다시 태어나고 싶었어요.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이 마음은 정상적인 거고 그 아이한테 고백도 할 수 있을 텐데. 싶었어요.


어쩌다 소풍 때 그 아이랑 옆자리에 같이 앉게 되었는데 걔가 제 어깨에 기대는 거예요.

그 순간 떨려서 말도 못 하고, 고장 난 로봇처럼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만 찔끔찔끔 흘렸던 기억이 나요.


그 뒤로 그 아이가 저에게 친하게 지내자고 손편지도 주고 그랬는데 저는 답장도 못 했어요.

속으로 '막 너는 우정이지만 나는 사랑이야.' 이래 가면서 혼자 드라마 찍고 완전 세상 쭈구리였어요.


중학교 때는 '여자 좋아하는 여자'가 제 삶에서 가장 큰 고민거리였고 아무리 고민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어요.

사춘기 때 지나가는 감정인가? 주변에 여자밖에 없어서 그런 걸 수도 있어.

사랑 아니고 동경일 거야. 그땐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렸어요.


지금 와서 보면 그때 내렸던 결론은 다 틀렸죠 뭐.

사춘기가 지나도 여자를 사랑하고, 남자가 바글바글한 공대를 들어가도 남자보다는 이쁜 여자한테 눈이 가고 가슴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어요.


퀴어라면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대해 많이 고민해봤을 거라 생각해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신 분도 있을 테고, 심각하게 걱정하고 아파하신 분들도 계실 거예요 분명.


저는 아직도 정체화를 하는 과정인 거 같아요.

레즈비언에서 바이 섹슈얼로, 바이에서 레즈비언으로..


젠더학에 무지했던 제가 요즘에 새로운 용어들을 알게 되었어요. 시스더나 젠더 퀴어 등등,

좀 더 공부를 하고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더라고요.

나를 무엇으로 정체화할지 당장 답을 내리지 않아도 고민해보는 거 그 과정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틀린 것이 아니고 다양한 많은 사람중 한 사람일 뿐이니까.. 겸손해지면서도 자존감이 높아지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접할 때도 조금은 너그러워지는 거 같아요.

나의 개성이, 내 인권이 존중받아야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존중받아야 하는 한 사람이고,

나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게 쉽진 않지만, 함께 살아가는 거니까 받아들이는 거 말곤 다른 방법이 없죠.


이성애자들도 이런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대해서 고민을 해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려고요. 지금까지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주말 재미나게 잘 보내시고 맛난 거 많이 드시고 미세먼지 조심하시고 잠도 푹 주무세요. 안녕.



레즈비언 생활 보고서 | 레 생보는 팟캐스트와 인스타도 하고 있어요.

팟빵  http://m.podbbang.com/ch/14488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lesreports
이메일  lesre4t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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