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멜버른
올빼미형 아빠와 아침형 엄마가 만나 생긴 아이는 누굴 더 닮았을까? 답은 ‘둘 다 닮는다’ 이다. 그렇담 엄마처럼 일찍 자고 아빠처럼 늦게 일어나면 좋으련만 우리 애들은 그렇지 못하다. 더 놀고 싶은 아이는 아빠가 안 잔다는 핑계로 놀다가 늦게 자고 엄마를 닮아 아침에는 일찍 일어난다. 하루에 취침 시간이 엄마 아빠보다 짧다. 거기에 여행까지 더해지니 체력 좋은 윤정이도 다크 서클이 입까지 내려왔다. 결국 어제 그림일기를 못하고 퍼지는 바람에 아침이 되어서야 시작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윤정이가 그림일기에 자꾸 상상력을 더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뭐 그냥 그림 그리는 것이면 모르겠지만,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에 상상을 더하는 것은 아닌 듯하여 몇 번 이야기했는데도 오늘도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었다. 순간 반항하는 것으로 느껴져 결국 크게 화를 내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리 크게 화를 낼 일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우리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그동안 누적된 피로가 예민하게 만든 것 같다. 피곤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일단 더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아침도 미루고 다시 들어가서 누웠다.
잠시 눈을 붙였을까? 윤정이가 배가 아프단다. 어지간하면 아프다고 안 하는데 제법 아픈듯하다. 어디가 아프냐고 하니 왼쪽 배가 꼭꼭 찌르는 것 같단다. 순간 별생각이 다 떠오른다. 여행자 보험을 들어놓고 왔으니 병원에 가도 되긴 하지만 외국 의사를 만나는 것을 상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다. 또 각종 증명서를 제출해야 하는 보험 처리도 걱정이다. 열을 재보니 37.6도로 미열도 있다.
소파에 뉘어 담요를 덮어주었다. 아침도 떠먹이고 TV 틀어주며 시중을 들었다. 시중드는 것쯤이야 아이가 아픈 것에 비하면 대수랴. 아침에 괜한 것으로 화를 낸 것이 더 미안해진다.
순간 짚이는 것이 있어 혹시 응가를 했냐고 물어보니 어제부터 안 한 것 같단다. 하하 이거 변비라서 똥배가 아픈 것 같은데? 다행히 아이들 변비에 먹는 약을 챙겨 오길 잘 한 것 같다. 약부터 먹이고 물을 충분히 먹였다.
죽을 먹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채소와 고기 다진 것으로 죽도 해서 먹였다. 점심시간이 지나서도 소식이 없다. 배는 점점 더 아프다고 하고 여러 번 화장실에 가서도 안 나온다고 한다. 이제는 정말 병원을 가야 하나. 혹시나 가까운 곳에 한인이 운영하는 소아과라도 있는지 검색하려는 찰라. 윤정이가 소리친다.
"아빠 나왔어~" 크크크
후다닥 달려가 보니 굵은 소시지 하나가 나와 있는 게 아닌가. 어찌나 반갑던지. 나중에 물어보니 엄마 아빠가 잠드는 바람에 배가 아파도 참았단다. 왜 참았냐고 물어보니 혼자 닦기 힘들어서라고. 그럼 왜 깨우지 않았냐고 하니 아침에 혼나서란다. 별거 아닌 거로 혼낸 것이 이렇게 오전을 그냥 보내게 만들었다. 휴직하고 이렇게 길게 여행을 다닐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아이들이 공이 크다. 윤정이는 태어나서 6개월부터였고 수정이는 100일도 안 되어서 캠핑을 나갔다. 흙 만지고 큰 아이가 잔병이 없다고 했다. 아이들이 아프지 않고 하루하루를 소화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 같다.
윤정이 아픈 것은 해결되었으니 그냥 집에만 있을 수 없지. 급하게 가까운 여행지를 검색했다. 멜버른으로 와서 처음 다녀왔던 단데농 국립공원의 속살을 좀 더 편하면서도 분위기 있게 감상할 수 있는 증기기관차 퍼핑 빌리(Puffing Billy)가 있다고 해서 급히 떠났다.
입장권을 끊고 들어와 객석에 자리를 잡았다. 인증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을 때 어디선가 녹색의 증기기관차가 와서 객차와 결합을 했다.
“아빠 퍼시다 퍼시”
“엥? 푸쉬?” “아니.. 토마스와 친구들의 ‘퍼.시.’ 말이야”
평소에 난 꽤 좋은 프렌디(프렌드+데디 : 친구 같은 아빠)라고 자부했었는데 아직 윤정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이름까지는 마스터 하지 못했다. 이러고서는 뭔 프렌디라고 설쳤는지. 실제로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증기기관차인 퍼핑 빌리가 토마스와 친구들이라는 애니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1900년대부터 달리기 시작한 퍼핑 빌리는 1953년 산사태로 그 선로가 막히면서 폐쇄되었다. 버려져 있던 퍼핑 빌리 철도는 1962년에 복구 후 지금의 관광 기차로 거듭나게 되었다.
퍼핑 빌리의 핵심은 달리는 객차에서 창가에 걸터앉아 단데농의 자연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단 신발이 빠질 수 있으니 아이들 신발은 미리 벗기는 것이 좋겠다.
'뿌~~~ 뿌~~~'
흰색 증기를 한껏 내뿜는가 싶더니 천천히 기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모두 창문으로 발을 내밀고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지금까지 타본 관광 열차와는 차원이 달랐다. 증기기관차라는 감성보다는 단데농의 원시림을 눈앞에서 편하게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멋졌다. 이따금 울리는 증기 소리와 '투닥 투닥' 선로 소리는 풍경에 더해지는 양념이 되었다. 곧게 뻗은 유칼립투스 나무는 그 끝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높게 자라고 그 사이사이로 사람 키만 한 양치류 식물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 한껏 햇빛을 받은 양치류 잎의 연한 녹색이 이렇게 예쁜지 전에는 미쳐 알지 못했다.
한 30분 정도 지난 것 같았는데 시계를 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인 나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겼던 것 같다. 기착지에서 잠시 시간이 주어졌다. 에메랄드 호수에서 잠시 산책도 하고 커피 한잔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출발 시각이 다 되어 역으로 돌아가려는데 후드득 비가 온다. 불과 한 시간 전 벨그레이브를 출발할 때는 따가울 정도로 햇빛이 강하더니 어느새 숲은 차분해지고 촉촉한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호주 남단의 도시답게 시드니와 달리 멜버른은 아직 겨울 같은 봄이다. 해가 비치면 따뜻하다가도 그늘만 들어가도 아직은 쌀쌀한 날씨다.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한 숲의 봄바람은 아직 쌀쌀했다.
7살 아이의 그림일기
“이야~~ 그동안의 일기 중에서 가장 길게쓴 것 같은데? 근데.. 기왕이면 큰돈들인 기차나 뭐 그런것 그려주면 안 되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