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준성 May 15. 2018

그들은 ‘샤코탄 블루’라고 부른다|카무이미사키

홋카이도 한 달 살기

“집이 조용하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다. 

잠깐이었지만 함께했던 서온이네가 떠나고 맞은 아침 공기에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그들이 남겨 놓고 떠난 아쉬움 인지 우리가 내뿜은 기운인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으면 침대를 뚫고 내려갈 만큼 기분이 가라앉을 것 같아 바삐 움직여 보기로 했다. 기왕이면 먼 곳으로.  


대충 씻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샤코탄반도. 가고 싶었던 버킷리스트 중에서 가장 먼 곳으로 정했다. 내비게이션은 베이스캠프인 니세코에서 샤코탄반도로 가는 길을 오타루 방향의 요이치(Yoichi)쪽으로 제안했다. 하지만 조금 멀리 돌더라도 푸른 바다를 끼고 달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니세코에서 이와나이(Iwanai) 해안도로를 따라 샤코탄반도로 가는 것으로 정했다. 



이와나이에서 샤코탄반도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홋카이도 남부에서도 손꼽히는 드라이브 명소이다. 50㎞ 정도의 거리를 해안도로를 따라 바다와 함께 달렸다. 관광객이 주로 찾는 지역이 아니라 그런지 한적한 어촌 느낌이었다. 우리나라 일부 해안도로에 어김없이 보이는 번쩍번쩍한 횟집 간판 같은 것은 눈 씻고 보려야 볼 수 없었다. 푸르름과 파도 그리고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는 우리만 있을 뿐이었다. 


한 절반쯤 달렸을까? 터널을 지나자마자 커다란 고깔 모양의 섬이 나타났다. 구글 지도에서는 이 섬의 이름이 ‘벤텐(弁天島)’이란다. 일본에서 벤텐이라는 이름의 섬이 5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만큼 이름 없는 섬에 흔히 붙이는 명칭이다. 흔한 이름의 섬 하나가 이렇게 예쁘다니. 정말 천혜의 자연환경을 물려받은 복 받은 홋카이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이와나이에서 시작된 해안도로 옆 바다는 일반적인 바다색과 같았다. 하지만 샤코탄반도와 가까워지자 바다 색깔도 점점 진하면서도 투명한 파란색이 되어 갔다. 소문으로만 듣던 ‘샤코탄 블루(Shakotan Blue)’ 색의 바다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점점 커진다. 우리의 목적지인 샤코탄반도의 바다 색깔을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 하여 ‘샤코탄 블루’라고 부른다고 한다.



벤텐섬을 지나서도 카무이미사키(Kamuimisaki, 神威岬)에 도착할 때까지 차를 몇 번은 더 세웠던 것 같다. 다행히 아침나절에 처지던 기분은 한결 가벼워졌다. 마치 영화에서나 볼 법한 해안 절경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수많은 유혹(?)을 겨우 이겨내고 카무이미사키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카무이미사키 전망대(제일 끝부분)까지는 왕복 1시간 정도 걸린다. 중간중간 사진 찍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1시간 30분도 부족하다. 준비해 온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하고 본격적인 투어를 위해 출발하려 할 때 한 무리의 한국 사람들이 지나갔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한국 가이드가 앞장서고 있었다. 반갑기도 하고 혹시 우리가 모르는 좋은 정보를 줄 것 같아 귀를 쫑긋 세웠다. 


과거, 여자들이 오는 것을 금지 했던 '여인금제의 문'


“30분 후에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화장실 다녀오시고 저기 보이는 ‘여인금제의 문’까지만 다녀오세요. 끝까지 다녀오려면 1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크게 볼 거는 없어요.”


뭔가 대단한 정보를 기대했던 우리는 피식 웃음이 났다. 패키지여행이 아닌 자유여행으로 오길 백번 잘했구나. 만약 우리도 저 무리에 있었다면 가이드의 말만 믿고 문 뒤까지는 가보지 못했겠지. 샤코탄 블루의 바다를 직접 보지 않고 카무이미사키를 다녀왔다 할 수 있을까.



‘카무이’는 아이누어로 ‘정령’이나 ‘신’을 뜻한다. 홋카이도의 토착민인 아이누인들은 여기를 신성한 신들이 사는 곳이라 여겼다. 마치 용이 승천하는 듯한 모습과 짙푸른 바다를 보며 충분히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다. ‘미사키’는 ‘곶(바다를 향해 뾰족하게 뻗은 땅)’이라는 뜻이다.


카무이미사키 끝으로 향하는 길. 언덕 위에 ‘여인금제의 땅(女人禁制の地)’이라는 글씨가 쓰인 문이 보인다. 여자들이 올 수 없는 땅이라니. 아이누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여자들이 배를 타면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신성한 땅인 ‘카무이 곶’에도 여자들이 오지 못하게 했었다. 



물론 지금은 ‘여인금제의 문’만 남아 있고 남녀가 지나다니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예전에는 지나다니지 못했을 문을 아무렇지 않게 걷다 보니 우리의 딸들이 속설이 진실로 여겨지던 시대가 아닌 지금 시대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다행인가 싶었다. 차별과 편견 없는 환경에서 마음껏 꿈을 실현하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인금제의 문을 지나 카무이미사키로 향했다.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40분쯤 걸어가면 끝에 닿는다. 난간 옆으로 멀리 카무이미사키 끝이 살짝 보인다. 길쭉한 카무이곶이 마치 누워있는 공룡의 머리 같았다. 그 앞에 있는 ‘카무이 이와’를 한입에 삼키려는 듯한 모습이 아이누인들에게 신성한 곳으로 섬기게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마치 공룡이 먹이를 먹으려는 모습이다.


둘째를 계속 안고 갈 자신이 없어 가지고 온 유모차는 좁은 길과 계단 덕에 아이보다 더 짐이 되었다. 대충 접어 한구석에 버려두고는 아이를 안고 걸음을 이어 나갔다. 구름이 오락가락하더니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 한 편은 구름 하나 없이 맑은데 다른 쪽은 회오리바람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 어렵게 먼 길을 달려온 샤코탄반도인데 ‘샤코탄 블루’의 바다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나 싶어 마음이 급해졌다. 


“이거, 여자 셋이랑 같이 와서 그런 거 아냐? 크크”

“여자 셋한테 혼나 볼래?”


카무이미사키로 향하는 길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은 회오리와 비바람이 몰려오고 있고 왼쪽은 푸른 하늘이 이어진다. 드라마틱한 풍경이 신성한 땅에 발을 디뎠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둘째가 점점 무거워지고 숨이 턱에 닿을 때쯤, 샤코탄반도의 바다가 발아래로 가까이 다가왔다. 정말 생전 처음 본 색이다. 그동안 내가 알던 그 어떤 푸른 계열의 색깔 단어를 다 생각해 봐도 어울리지 않는다. 뭔가 다른 푸른색. ‘샤코탄 블루’라는 단어만이 어울릴 것 같은 그런 색이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흐린 날씨 덕분에 못 볼 줄 알았던 그 바다색을 만난 것이다. 아이의 반응은 실로 폭발적이었다. 감탄에 감탄을 이어갔다.



“아빠, 태어나서 처음 본 색깔 같아! 너무 예뻐서 내 스케치북에 담고 싶어.”

“응, 아빠도 처음 본 색깔의 바다야.”


그런 바다를 우리는 말없이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절대 잊지 않을 심산으로 눈에 담고 또 담았다. 바다도 담고 아이들의 모습도 담고. 가족 모두를 눈 그리고 가슴에 갈무리했다. 눈을 감아도 다시 그 색이 그려질 만큼 실컷 바라보고 나서야 겨우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다행히 날씨가 더 나빠지기 전에 카무이미사키 끝에 다다랐다. 멀리 동해 촛대바위처럼 생긴 ‘카무이 이와’가 보인다. 짙푸른 바다와 그곳을 우뚝 지키고 서 있는 카무이 이와의 풍광이 아이누인들에게 이처럼 경외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윤정이가 동전을 달라고 하더니 다른 사람들의 소원 사이로 동전 하나를 조심히 올려놓는다. 비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두 손 모아 소원을 빈다. 질끈 감은 눈이 마냥 귀엽고 사랑스럽다. 꽉 맞잡은 두 손에 힘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을 보니 뭔가 대단한 소원을 비는 듯했다. 



“윤정아, 무슨 소원을 빌었어?”

“우리 가족 건강하게, 지금처럼 계속 여행하며 살게 해달라고 했어.”

윤정이를 비롯하여 모든 이의 바람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Travel Tip>


내비게이션

일본 렌터카를 빌릴 때 한국어 내비게이션을 신청하면 장착된 차를 빌릴 수 있다. 주소나 이름으로 검색하기는 힘들고 보통 ‘맵코드’ 또는 전화번호(책의 주요 장소는 내비게이션을 위한 전화번호를 적어 놓았다)로 검색을 한다. 주요 관광지는 가이드북에 맵코드를 제공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구글맵이 더 유용했다. 포켓와이파이 등으로 인터넷만 연결할 수 있다면 사실상 구글맵이 영문과 한글 검색이 편해서 많은 도움이 된다. 출발 전에 미리 갈 곳을 검색하고 즐겨찾기만 넣어놔도 상당히 편하다. 다만, 현지 상황에 따라 인터넷 연결이 불가능할 경우가 있어서 Maps.me 같은 오프라인 지도앱(미리 지도를 다운로드할 수 있다)도 같이 준비하는 것이 좋다. 추가로 자동차용 스마트폰 거치대도 챙겨가면 안전운전에 도움이 된다.  

이전 08화 가족에도 인연이 있다|삿포로 마루야마 동물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